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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뻘 속의 생명들 / 김재희

뻘 속의 생명들 / 김재희  

 

 

 

뻘 위에서 차를 마시고 있다. 발아래는 깊이를 모르는 뻘밭이고 차에서는 새큼한 해금 맛이 풍기는 듯하다. 갈매기가 바로 눈앞까지 날아와 이마를 차고 갈 것 같고 청둥오리 한 쌍도 두려움 없이 발밑으로 기어든다.

바다와 맞닿은 강 하루 어느 찻집 구석에 앉아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앉은자리 창 밑까지 물이 찰랑거리더니 물이 점점 빠지기 시작했다. 질펀한 뻘이 모습을 드러내고 뻘 속의 생명들이 참았던 숨을 토하듯 꿈틀거린다. 받침대 두 개가 뻘 속에 묻힌, 사람 없는 한적한 찻집이어서 염치없이 한나절을 묶어 놓았다. 뻘밭의 한 나절 동안 참 많은 사건들이 발생했다.

아주 작은 게들이 얼굴을 내민다. 잘 보이지 않는 구멍에서도 움직임이 느껴진다. 서로가 서로에게 신호를 보낸 것일까. 하나 둘씩 나들이를 나오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뻘밭 가득 그들의 세상이다. 가만 가만 움직이는 평화의 땅이다. 그러다 뭔가 침입이 느껴지면 움직임이 날렵하다. 그들이 각자의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길은 엉키는 법이 없다. 그들에게는 규칙이 있었다. 위협을 느끼는 순간에는 잽싸게 집 앞까지만 이동했다. 한 손을 문고리를 잡고 한 발은 문턱 안으로 들여놓은 상태다. 그러다가 여차하면 순간에 쏙 들어가 버리는 그 행동의 민첩성이 놀랍다. 잔잔히 스멀거리다가 순간에 잠잠해지는 뻘 표정은 어떤 방법으로도 그려낼 수 없는 삶의 현장이었다.

갈매기의 먹이는 갯지렁이다. 사뿐사뿐 걸어가다 긴 부리로 한번 찍으면 그대로 지렁이가 물려 나왔다. 한 번도 실수하는 법이 없다. 수없이 많은 구멍을 보면서 걷다가 어느 한곳을 알아내고 찍어내는 그 정확한 먹이 사냥도 또한 놀랍다. 결코 먹이를 놓치지 않는 갈매기의 사냥 솜씨에 박수를 쳐야 할지, 속수무책으로 물려 나오는 갯지렁이에게 더 연민의 정을 보내야 할지 모를 일이다.

오리걸음이라더니, 뒤뚱거리는 청둥오리 궁둥이를 보며 콧바람 새는 웃음을 흘렸다. 누군가가 저희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웅덩이 한곳을 한참이나 뒤적이다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나간다.

원하는 먹이를 먹었는지 못 먹었는지 종잡을 수 없다. 시간이 갈수록 저들의 평화스러운 모습 뒤에는 먹고 먹히는 생존경쟁의 살벌함이 짙게 도사리고 있었다.

근처의 박물관에서 뻘 속의 생물들이 들어간 깊이를 보았다. 대부분 연하고 부드러운 몸체인 것들은 거의 표면 가까운 곳이었고 단단하고 두꺼운 것일수록 그 깊이가 깊었다. 약하고 방어 능력이 없는 것일수록 거처하는 깊이가 얕았다.

불현듯 어떤 사극이 연상됐다. 허름한 옷을 걸친 백성들이 사는 곳은 고개만 돌리면 다 들여다보이는 허술한 담이 있을 뿐인데 권력이 높고 잘사는 사람들 집은 들어가는 대문부터 거창하고 복잡했다. 중간 문을 몇 개나 거친 후라야 사람을 만날 수 있지 않던가. 어쩌면 갖춘 것일수록 방어벽을 높이 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물의 세계에서만 깊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의식의 세계에서도 깊고 얕음이 선연했다. 내가 당한 일만 해도 그랬다. 좀 더 신중하게 처신하였더라면 이렇듯 처절한 심정을 겪지는 않았을 텐데. 상대방을 대하는 내 마음이 너무 얕고 허술했던 것 같다. 그저 좋게만 생각했던 내 순수함이 터무니없게도 불순한 동기로 이용당해 버린 상황이 되어서야 상대의 본의를 알아차렸다. 억울하기보다는 무서웠다. 무서워서 눈물이 나왔다. 진심이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처럼 비참한일이 또 있을까 싶다.

생존경쟁의 세계에서 난 언제나 한 발짝 뒤져 있는 편이어서일까. 맥없이 물려 나오는 갯지렁이의 운명에 초점이 모아졌다. 먹혀 버리고 마는 약자의 편에서 강자의 무자비함을 탓하고 있었다. 내가 당한 일을 놓고 문제의 원인을 상대방에게 돌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스스로 현명하지 못했던 사실을 번복해 보려는 심정이었으리라.

한 떼의 무리가 사라지고 또 다른 무리가 날아와 먹이를 찾다가 사라지는 현장을 지켜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뻘밭은 그저 존재한다는 의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은 평화가 깃들어 있는 곳이라고 단정할 수도, 삶의 치열함으로 뒤얽힌 처절한 공간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었다. 꿈틀거리는 생명을 품고 있을 뿐이었다. 꿈틀거리는 생명, 꿈틀거린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신비스러운 일인가. 비록 내게 조금 불행한 일이 생겼다 해도 분명 나는 꿈틀거릴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거대한 뻘 속 어딘가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생명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살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몇 잔의 차가 비워지고 눈에 보이는 뻘밭의 면적이 넓어지는 만큼, 진하게 뭉쳐 있던 분노가 엷게 분산되어 나갔다. 기울어져 가는 햇살이 몇 바퀴 돌아가 버린 시계바늘 위에 앉는다. 햇살의 무게가 더해져도 시계바늘의 속도는 변하지 않으리라. 눈에 보이나 잴 수 없는 무게에 눌려 내 생의 여정이 터덕거리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툭 털고 일어나 묵직하게 밀고 들어섰던 문을 가볍게 젖혀 열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