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복顚覆 / 김은주
젊은 치기와 늙은 달관이 한 몸에 존재한 백남준이 바이올린을 끌고 우주 밖으로 떠나갔다. 바이올린은 켤 수도 있지만 끌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몸소 보여준 그는 전복과 발칙함을 일생의 미덕으로 삼았다. 그는 흰 장미가 드리운 관 안에 배추 색 저고리를 입고 두 손은 가지런히 배 위에 놓은 채 누워 있다. 생전의 그의 삶은 결코 조용하지 않았지만 누구나 가는 순간은 고요할 수밖에 없나 보다. 피아노를 부수고 관객의 머리에 세제를 부으며 자신의 알몸이 첼로가 되기도 했던 그의 생전모습을 기억하자니 고요한 그의 모습이 낯설기 그지없다. 조사弔使를 마친 오노 요코가 옆 사람의 넥타이를 자른다. 조문객 역시 일제히 옆 사람의 넥타이를 자르기 시작한다. 혹 비싼 넥타이라면 나중에 그를 만나 보상받으라는 사회자의 말에 엄숙하던 식장이 웃음바다가 된다. 메기 위한 것이 넥타이라면 자를 수도 있다는 걸 그는 여실히 우리에게 보여줬다. 그의 가슴위에 수북이 쌓인 잘린 넥타이를 보고 이자니 그는 황천길에서도 저 잘린 넥타이로 무슨 기묘한 퍼포먼스를 기획하지 않을까싶다. 심장이 정지한 후에도 끝없이 진행되는 그만의 공연인 것이다.
그를 딱히 한마디로 정의할 단어가 없다. 평생 관객을 조롱하고, 싸우며, 부정하던 그였다. 늘 선정적이고 과격한 그의 공연은 경찰을 출동시키는 해프닝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정신세계는 한 많은 박수무당이 빙의된 듯 도하고 때로는 우주 밖 외계의 추장 같기도 했다. 극과 극을 내닫는 그의 정신세계는 끝내 몸을 치더니 뇌졸중으로 인한 반신마비를 남겼다. 왼쪽이 마비되었다고 해서 그는 정지 하는 법이 없었다. 영혼이 담긴 오른손으로 쉼 없이 작업에 참여 했다. 다양한 방법으로 관객을 자극하고 참여시키는 그의 작업은 대중과 관객을 소외 시켜온 기존의 순수예술을 단박에 갈아엎고 예술 원형을 회복하고자하는 그만의 노력이었다. 규격화된 예술을 희롱하듯 파괴 했고 기발한 아이디어로 관객을 놀라게 했다. 신명난 그의 굿판 아우라에 한번 젖어 본 사람은 그를 사랑하지 않고는 베길 수 없어진다. 황당함과 어처구니없음이 끝내는 그에 대한 애정으로 바꿔어지는 절묘한 순간인 것이다.
내가 그를 처음 접한 때는 80년대 말쯤이었다. 끝없이 쌓인 TV 조형물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기발한 사고의 전환이 낯설면서도 신선했다. 캔버스를 벗어나 시시각각 변하는 화면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의 예술세계는 기존의 우리 머리속에 잠재해 있던 숱한 생각을 해방시켜 줬다. 그즈음 나는 사진에 빠져 모든 사물이 사각의 앵글 속으로 들어오던 시절이었다. 사각이라는 규격화된 생각의 틀을 부숴준 사람이 바로 그였다. 산업과 전자 기술의 잔해들조차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온몸에 전율이 일었던 생각이 난다. 그의 철학은 장르와 장르간의 소통과 사람과 사람간의 소통이 큰 화두였다. 그의 논리에서 보자면 모든 사물이 대화 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랬기에 우주에다 대고 위성방송을 했을 것이다. 누구도 할 수 없는 그 만의 소통 방법인 것이다.
예술을 사기 중에서도 고등사기라고 외치던 그는 예술은 속고 속이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고 말했다. 평생 일탈의 예술만 영위해온 그에게는 늘 악평이 꼬리표처럼 따라 다녔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으며 자신은 악평을 먹고 자란다고 당당히 말했다. 악평이 일용할 양식이 된다고 생각한 그의 신념은 전복을 꿈꾸는 테러리스트였다. 그의 예술에 종 주먹질을 하는 풋것과 쉰 것들을 그는 끝없이 색다른 퍼포먼스로 종식終熄시켜 버렸다. 철저하게 반反예술을 부르짖던 그의 의식 안에는 *플럭서스Fluxus가 자리하고 있었다. 형식과 감수성 이성이나 개성 따위를 전체적으로 부정해 버림으로서 새로운 퍼포먼스 아트를 등장시켰다. 독일에서 일어난 이 전위예술의 바탕이 그의 모든 사유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누구의 예술세계도 넘보지 않았다. 자신만의 독자적인 명민함을 영육에 어혈진 꽃잎들을 만세계에 펼쳐보였다. 그를 플럭서스로 이끈 장본인은 존 케이지이다. 여름음악 학교에서 만난 그들은 후에 독일 공연에서 백남준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름으로 해서 절정에 이른다. 이 퍼포먼스가 그의 죽음의 길에도 새롭게 꽃을 피우며 재현된 것이다.
작은 체구의 지구촌 민주주의 건달이라 불리던 그도 흉중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심장에 더운피가 흐르는 한사람의 인간이었다.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한 인터뷰에서 "진짜 하고 싶은 게 뭡니까"라고 물으니 그는 "아! 연애"라고 짧게 말했다. 죽음을 목전에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한마디에서 그만에 피의 온도를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다. 용암 같은 뜨거움이 평생 기막힌 작품을 탄생 시켰을 것이다. 그를 위해 김치를 사다 나르던 아내 시게코 쿠보다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우리 곁을 떠나갔다. 뼛가루와 함께 한국 땅을 밟은 그의 작품은 다름 아닌 "엄마"였다. 살구 빛 한복 치맛자락에 고인의 서명이 매우 심플하고 감정적인 작품이었다. 엄청난 파격을 선보이던 그도 돌아앉으면 봄 볕 같은 한 어머니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예술로부터 예술을 해방시킨 혁명가이지 자유인인 그는 낙뇌의 서늘한 눈빛을 남기고 우주 밖으로 사라져 갔다. 눈만 감으면 잘린 넥타이들이 징소리처럼 내게 범람해 온다. 봄이다. 언 땅도 녹아 모두 갈아엎고 있다. 엎는다는 것은 기존의 틀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틀을 인정하며 또 다른 기습적인 생각을 뿌리내림으로서 새로운 사고 하나를 재창출 해내는 것이다. 이제 그가 갈아엎어놓은 땅에서는 씨앗과 벌레들이 살아 움직이며 새로운 퍼포먼스를 시작할 것이다. 죽어서도 우리를 웃긴 그는 바이올린을 끌고 어디로 갔을까.
*플럭서스(Fluxus)-1960년대~70년대까지 독일의 여러 도시로부터 일어난 국제적 전위예술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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