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 유정림
두려움보다 빠른 걸음으로 진통은 찾아왔어.
이유도 모른 채 대지에 던져진 이후로 가장 정직한 고통과 마주한 거지. 지구본처럼 부풀어 오르는 배를 보고 눈치를 채야 했어. 대지의 음란하고 성스런 비밀이 어둠을 뚫고 심장에 박혔을 때. 그 때가 시작이었을 거야. 산다는 것과 흥정을 하다가 고통을 맞이하는 예식일랑 홀랑 잊어버렸는지 몰라. 벌거벗은 몸으로 나뭇가지 하나 가리지 못하고 침대 위에 올랐어. 하늘이 느리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았지. 황량한 벌판에 뚝 잘려 버려진 나무둥치처럼 혼자이었어. 천천히 저 두꺼운 공중의 하늘에 구멍이 나기 시작하는 거야. 생명을 가진 것이라면 모두 통과한 터널 같은 거 말이야. 난 태초의 어미를 만나 목 놓아 울었어. 양 갈래 얌전히 땋은 머리는 온데간데없고 호모 사피엔스라나 뭐라나 암컷 한 마리만이 핏물에 젖어 헐떡거리고 있었지. 숭고한 영혼은 어디로 숨었을까. 그 때 알았어. 그런 건 한 장의 얇은 천에 불과하다는 것을.
'수필세상 > 좋은수필 3'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필]배신 / 최재남 (0) | 2017.03.13 |
---|---|
[좋은수필]佛影寺에서 / 목성균 (0) | 2017.03.12 |
[좋은수필]전복顚覆 / 김은주 (0) | 2017.03.10 |
[좋은수필]목각의 눈 / 김정화 (0) | 2017.03.09 |
[좋은수필]뻘 속의 생명들 / 김재희 (0) | 2017.03.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