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 / 최재남
막 문자를 보내려던 참이다. 사무적으로 보낸 앞의 문자가 걸려서 <아침부터 한 건 했네요. 조금 가다릴 걸 서두르다보니 불편을 드려>, 거기까지 쓰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방금 통화한 보험회사 직원이다. 그쪽에서 손가락을 다쳤다고 하는데 맞느냐고 묻는다.
네에, 왼쪽 검지 위쪽을 약간 긁혔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약국 가자고 해도 별 거 아니라고 해서…. 세 번이나 권했고 보기에도 별 거 아니기에 말씀 안 드렸는데 그 얘길 하던가요?
대물만 아니고 대인까지 접수해야 한다며 보험료가 오를 거라 했다. 뭐 어쩌랴. 100% 내 잘못이라 인정해놓고, 또 사실이 그런 걸 이제 와 어쩌랴만 씁쓸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다.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이 한 마디 거든다. 주변에서 가만 안 둘 거야. 받아낼 수 있는 건 다 받아내라고 부추길 걸. 뭐 받아내고 말고 할 것도 없어. 정말 살짝 긁혔다니까. 그리고 내가 약국 가자고 몇 번이나 얘기했는데 괜찮다고 했단 말이야. 애꿎은 남편을 향해 쏘아붙였다.
목적지를 가려면 큰길에서 좌회전을 해서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야 한다. 주차공간이 부족한 골목은 늘 차들이 불법으로 주차되어 있어서 복잡하다. 그날따라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짐 차 때문에 어쩌지 못하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골목 끝이 목적지이고 일찍 도착한 편이라 서두를 필요 없이 잠시 지체해도 될 판이다.
앞뒤 차문을 열어놓고 뭔가를 내리고 있던 남자는 내 차를 보자 차 문을 향해 걸어갔다. 차 문을 닫아주기 위해 걸어가는 그를 보며 서서히 액셀을 밟아 나가고 있는데, 드르륵 끝부분에 뭔가 걸렸다. 급하게 차를 세우면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굼뜬 그의 시간차 행동을 계산에 넣지 못한 나의 잘못이었다. 젊은 남자는 멀뚱하게 나를 건너다봤다. 이게 무슨 짓이냐는 듯.
분명 그가 차문을 닫았을 거라는 착각에서 시작된 배신의 서막이었다. 남자는 급할 것도 서두를 것도 없는 초연한 자세였다. 자 이리 되었으니 이제 어쩌겠느냐, 너의 서두름이 남다르다했다 뭐 그런 표정으로, 대물 접수할 때까지 성가시긴 해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한없이 착해보여서 ‘이까짓 것쯤이야’ 너그럽게 넘어갈 것 같았다.
손가락을 주물거리기에 지금 다친 거냐고 물었더니 우물우물 긍정도 부정도 아니게 끄덕거렸다. 아이고, 그럼 병원가야지요 하면서 오버를 했고 남자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순진하게 고개를 저었다. 세 번을 사양하는 남자를 보며 충분히 내 진심이 전해졌으리라 여겼다. 그냥 보기에도 병원 갈 정도도 약국 갈 정도도 아니었으니까.
그것이 오롯이 나 혼자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극구 사양하며 착해 보이던 남자가 범상치 않은 펀치를 날린 건 주변 사람들의 입김 탓이리라.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소한 긁힘으로 사건은 갑자기 부풀어 오르고, 착함이라 믿었던 그에게서 야누스의 얼굴을 본다.
그토록 권할 때는 괜찮다. 아무렇지 않다 해놓고, 뒤돌아 냅다 한방 날린 게 그의 탓만은 아니었을 터, 아닐 거야. 그의 착함에 반한 내 기억은 자꾸 자꾸 되돌려 덮어쓰기를 한다. 진심이 아닐 거야. 그의 귀가 아무리 가벼워도, 그의 계산이 아무리 약삭빨라도, 그의 진심은 절대 아닐 거야.
수직으로 꽂힌 화살이 방향을 바꿔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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