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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쑥국을 끓이면서 / 한경선

쑥국을 끓이면서 / 한경선


 

 

봄인데 봄이라고 말할 수 없는 계절의 길목이 있다. 봄이 시작되는 날짜를 알 수 없으니 남녘 꽃소식에 귀를 세우고, 새싹과 꽃눈을 살피며 봄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쑥이 자라는 모습을 보고 봄의 키를 재다가 손가락 두 마디만 하게 쑥이 올라오면 쑥국을 끓여서 여린 봄을 삼킨다.

바다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던 멸치가 굽은 몸을 펴지 못한 채 냄비 속에서 빙빙 돌며 모였다 흩어진다. 제 의지와 상관없는 자맥질을 하다가 떠오른다. 끓는 물속에서 굳었던 몸이 펴진다. 멸치는 제게 있는 모든 맛을 맹물에 풀어 놓고 다시 바다로 가는 길을 찾아 나선다.

된장을 푼다. 푹 삶아 짓이긴 콩, 겨울 하늘 아래서 얼다 마르다 되풀이하며 봄을 기다린 메주, 누렇게 뜬 얼굴로 바라보는 해가 좀 길어졌다고 봄이 그리 쉽게 올 리 없다. 갈라지고 터진 메주 틈으로 샅샅이 소금물이 스며들었다. 쓰린 살이 속절없이 허물어져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서야 메주는 숨을 고르며 익어간다.

, 자갈을 밀어 올리고 나오는 솜털 보스스한 쑥을 보면서 해마다 다시 맞는 봄을 고마워한다. 쑥은 도시 뒷골목 콘크리트 담벼락 틈새에서도 고개를 내민다. 봄볕 아래서 봄비와 봄바람이 키운 밑동 토실한 쑥을 한 소쿠리 캤다.

뽀얀 쑥을 살랑살랑 어르듯 씻어 물기를 뺀다. 멸치 우려낸 물에 된장이 스스럼없이 스며든다. 어린 쑥을 그 물이 받아낸다. 흙빛 양수다. 목숨 내어 놓은 물이기에 어린 목숨 받아내는데 부족함이 없다. 그것들이 어우러져 쑥 향을 피워 올린다. 담담한 국물이 겨우내 뭉친 속을 쓰다듬어 풀어준다. 쑥국 한 그릇이 대지의 기운을 옮겨다 뿌려주면 흙을 닮은 몸이 깨어나고 부스스 봄이 온다.

쑥국을 먹어야 봄이 오는 이유를 여태 몰랐다. 제 목숨 떼어준 것들, 기꺼이 내게로 와서 뼈와 살로 보태진 것들이 이놈의 세상 못 살겠다.’고 내가 투정할 때마다 속에서 아우성이라도 친다면 어찌할 것인가. 내 몫까지 살아내라고 윽박지른다면 또 어쩔 것인가. 거저 주고 침묵하는 것들 앞에서 봄이 찬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