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국을 끓이면서 / 한경선
봄인데 봄이라고 말할 수 없는 계절의 길목이 있다. 봄이 시작되는 날짜를 알 수 없으니 남녘 꽃소식에 귀를 세우고, 새싹과 꽃눈을 살피며 봄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쑥이 자라는 모습을 보고 봄의 키를 재다가 손가락 두 마디만 하게 쑥이 올라오면 쑥국을 끓여서 여린 봄을 삼킨다.
바다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던 멸치가 굽은 몸을 펴지 못한 채 냄비 속에서 빙빙 돌며 모였다 흩어진다. 제 의지와 상관없는 자맥질을 하다가 떠오른다. 끓는 물속에서 굳었던 몸이 펴진다. 멸치는 제게 있는 모든 맛을 맹물에 풀어 놓고 다시 바다로 가는 길을 찾아 나선다.
된장을 푼다. 푹 삶아 짓이긴 콩, 겨울 하늘 아래서 얼다 마르다 되풀이하며 봄을 기다린 메주, 누렇게 뜬 얼굴로 바라보는 해가 좀 길어졌다고 봄이 그리 쉽게 올 리 없다. 갈라지고 터진 메주 틈으로 샅샅이 소금물이 스며들었다. 쓰린 살이 속절없이 허물어져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서야 메주는 숨을 고르며 익어간다.
흙, 자갈을 밀어 올리고 나오는 솜털 보스스한 쑥을 보면서 해마다 다시 맞는 봄을 고마워한다. 쑥은 도시 뒷골목 콘크리트 담벼락 틈새에서도 고개를 내민다. 봄볕 아래서 봄비와 봄바람이 키운 밑동 토실한 쑥을 한 소쿠리 캤다.
뽀얀 쑥을 살랑살랑 어르듯 씻어 물기를 뺀다. 멸치 우려낸 물에 된장이 스스럼없이 스며든다. 어린 쑥을 그 물이 받아낸다. 흙빛 양수다. 목숨 내어 놓은 물이기에 어린 목숨 받아내는데 부족함이 없다. 그것들이 어우러져 쑥 향을 피워 올린다. 담담한 국물이 겨우내 뭉친 속을 쓰다듬어 풀어준다. 쑥국 한 그릇이 대지의 기운을 옮겨다 뿌려주면 흙을 닮은 몸이 깨어나고 부스스 봄이 온다.
쑥국을 먹어야 봄이 오는 이유를 여태 몰랐다. 제 목숨 떼어준 것들, 기꺼이 내게로 와서 뼈와 살로 보태진 것들이 ‘이놈의 세상 못 살겠다.’고 내가 투정할 때마다 속에서 아우성이라도 친다면 어찌할 것인가. 내 몫까지 살아내라고 윽박지른다면 또 어쩔 것인가. 거저 주고 침묵하는 것들 앞에서 봄이 찬란하다.
'수필세상 > 좋은수필 3'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필]고욤 / 이정연 (0) | 2017.03.17 |
---|---|
[좋은수필]근채삼덕(芹菜三德) / 김소희 (0) | 2017.03.16 |
[좋은수필]발걸음 소리 / 조이섭 (0) | 2017.03.14 |
[좋은수필]배신 / 최재남 (0) | 2017.03.13 |
[좋은수필]佛影寺에서 / 목성균 (0) | 2017.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