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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목각의 눈 / 김정화

목각의 눈 / 김정화

 

      

 

정좌를 한 모습이 도도하다. 봉긋한 가슴을 드러내고 턱을 코끝으로 치켜 앵돌아진 표정에 배시시 웃음부터 나온다. 정수리 위로 틀어 올린 삼단 머리채 아래 잿빛 까슬한 살결을 만지며 온기마저 전해지는 듯하다.

처음에 이 목각을 어디다 두면 좋을까 하고 집 안을 서성거렸다. 거실의 빼곡한 책장 사이가 괜찮아 보였다. 나무 인형과 낡은 책장과 오래된 책들이 비슷한 향기를 내고 있어 낯설지가 않았다. 책장 한켠에 나목 인형의 특별석을 마련하고 니체의 <, 고독이여>라는 책을 곁에 두니 꽤 근사했다. 눈을 감은 듯 고개는 경사지게 뻗치고 입술을 샐쭉 내뱉는 폼이 제법 어울렸다.

검은 피부를 가진 나부裸婦조각상은 일전에 적도 부근의 섬 여행을 다녀온 지인에게 받은 것이다. 이 원주민 여인에게 정중히 손이라도 내밀면 찡긋 눈맞춤을 하며 전통춤이라도 추자고 할 표정이다. 하지만 그때는 무슨 쌤통인지 다비드 석상 같은 단단한 근육질의 나무裸夫모습이면 더 좋을 텐데 하는 짓궂은 마음이 앞섰다.

바람이 스치니 옷칠을 하지 않은 목각 여인에게서 습기를 잔뜩 머금은 열대꽃 냄새가 난다. 눈을 감고 숨을 들이켜면 보랏빛 꽃잎이 나부끼는 환상에 꽃내음이 더욱 익슥히 다가오는 것 같다. 불현듯 예전에 만든 점토 여인의 리라꽃 화관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한때 점토 인형 만들기에 몰두했던 적이 있다.

십여 년 전 그 시절은 참으로 힘겨웠다. 당시 인척과 돈거래로 손해를 입은 와중에 운영하던 공예학원 건물마저 은행에 넘어가는 이중고를 겪었다. 그때 견디기 힘든 시간의 무게를 걸러내느라 몇 계절 동안 작업실에서 살다시피 하며 인형을 빚었다. 유리병에 반죽한 흙을 넣고 나무 뼈대를 꿰어 얼굴과 몸체를 다듬으면서 화를 삭여나갔다. 완성된 점토 여인의 흙옷이 마르면 수분이 빠져나간 자리에 금이 생겨 기운을 잃기도 했는데 무르게 갠 점토로 틈을 메우는 공을 들이면서 지친 마음을 다스리게 되었다.

예전에는 점토 여인을 가졌는데 이제는 목각 여인을 곁에 둔다. 목각 여인을 바라보면 아물고 난 자리가 바람에 시리듯 '不狂不及'의 그 시간이 떠오른다. 밤을 새워 흙을 빚고 말리며 미친 듯이 몰두하던 혼신의 순간들, 붓질로 인형의 숨을 불어넣듯이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 했던 찰나의 기억들을 잊지 못한다. 그런데 최근에 또다시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일로 마음이 무너지게 되었다.

그동안 매진해왔던 교육 사업에 문제가 생겨 소송의 문턱에 이르게 된 것이다. 세무서와 노동부 등에 얽힌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았고 법률에 문외한인 탓에 이리저리 자문하러 다니느라 심신이 지쳤다. 나는 무시로 책장 앞을 들락거리다 나목 인형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호소하듯 그녀를 쳐다보며 툭툭 넋두리를 던지곤 했다.

-사는 건 흔들리는 일이야. 잔바람에도 강물과 나무가 흔들리는 데 휘감겨오는 삶의 폭풍우는 의지의 뿌리까지 휘청거리게 하니 견디기 힘들어.- 성긴 마음은 부동의 목인에게 호언보다 불평의 말을 더 쏟아낸다. 해결책을 마련하느라 고민에 싸인 마른 속은 쩍쩍 빗각을 그으며 터지고 있었다.

 

-금이 갔지만 무너지지는 않아. 오히려 연기는 균열을 뚫고 세상 밖으로 새어나가잖아.- 빗물 머금은 벽을 향해 이렇게 내 말을 되쏘아 주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목각의 시선은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일은 더 복잡해졌고 매사에 의욕을 잃게 된 나는 목각 앞에서 억지 부리던 일도 힘들어 그만둬 버렸다. 승부수가 나지도 않고 붉으락푸르락하는 내 낯빛과는 달리 자세 하나 흩트리지 않고 눈을 흡뜬 모습에 기가 꺾여서이기도 하다. 그러다 장시간 시시비비를 가리는 전화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상대측의 우격다짐에 입담 없는 말재간은 결국 백기를 내주고 말았다. 상한 내 맘은 안중에도 없는 듯 예의 그 목각 인형은 미간에 거미줄 주름을 잡고 가슴을 내밀며 빤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당장 그녀를 벽 쪽으로 돌려 앉혔다. 마음을 휘젓던 능변의 그들에 반해 한마디 항거도 못하는 목각 인형은 만만하기 그지없었다. 등 뒤에 대고 참았던 말들을 후두두 쏟아냈다. 그러고는 소송에 매여 무력한 나처럼 꿈쩍 않는 그녀를 구석진 곳으로 아무렇게나 옮겨 놓았다. 목각 인형 옆에는 읽다 만 소설책<우울한 귀향>이 비뚜름히 꽂혀 있었다.

화를 비운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간다. 지난날 속앓이를 한 통증까지 겹쳐서 생채기로 따끔거린다. 예전과 달리 지금의 나는 빗금진 마음결 하나 메우지 못한 채 가슴을 허비고 시가만 흘리는 심약자가 되어 버렸다. 흔들리는 바람에 몸을 맡기다 보면 키를 내리지 못한 뿌리는 중심을 잃게 된다. 어쩌면 바람이 일어 나무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바람을 맞고자 몸을 흔드는 것은 아닐까. 결국 바람도 마음에서 지는 것을.

빈속을 감춘 목각 여인을 바라본다. 지난번과는 달리 묵상에 잠긴 평온한 표정이 겨울 눈밭의 나무처럼 초연하다. 그녀의 얼굴빛이 시시때때로 변한 건 나의 눈이 변덕스러운 까닭이지 싶다. 사람의 마음이 목각의 얼굴에 실리어 시나브로 일상을 흔들어 놓은 것이 아닐까.

나무 인형을 처음의 자리로 옮겨 둔다. 내 손이 닿으니 굳었던 마음이 나긋이 풀어진다.

-진정한 자유란 스스로 놓아주는 거지.-

검은 눈이 말을 건넨다. 안달을 부리던 마음이 목각의 눈빛 앞에서 무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