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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종소리 / 홍미영

종소리 / 홍미영  

 

 

 

제 몸을 쳐야 소리를 낼 수 있는 종은 구도자 같다. 구도자의 길은 험하고 먼 길이다. 땅속 깊은 곳에 숨겨진 세월이 소리를 위해 밖으로 나오는 순간 선택은 고행의 시작이었다. 쇠는 변화하기 위해 지옥의 문을 수없이 넘나들어야 만했다. 자신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본질을 뭉개버리는 것이다. 자신을 죽여야 또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다. 죽음은 영원한 소멸이 아니었다. 탄생을 위한 거룩한 의식 같기도 하다.

쇳물이 되기까지 쇠는 땅속의 기억을 모두 버려야 하리라. 굳어진 기억과 겹겹의 세월들이 한 덩어리로 녹여진다. 오직 순결을 위한 산 제사가 되어야 하리라. 온전히 창조자에게 바쳐진 거룩한 몸이 되기 위한 순서이다. 불순물을 걸러내는 반복의 시간들을 새롭게 태어나는 인내의 길이다. 오랜 담금질은 자신을 비워냄과 순종과 낮아짐을 의미한다. 그것은 소리를 위한 겸손이다. 소리의 경지에 이르는 험난한 구도자의 길이 완성될 때 깊고 맑은 영혼의 소리로 울릴 수 있을 것이다. 종소리에는 무한한 구도의 의미가 들어 있지 않을까.

종의 존재는 오직 소리에 의미를 둔다. 그 울림은 어떤 언어보다 높고 고귀하다. 이제 종은 긴 기다림 속에 정제된 내면의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 있을 것이다. 긴 시간의 수레바퀴를 돌리듯 지구의 생성과 우주의 심호흡과 진리의 깨우침과 지구의 박동 소리까지 남김없이 쏟아내고 싶을 것이다. 그 소리에는 녹여진 세월의 이야기와 생명 근원의 순수성과 무소유의 자유를 맑고 고운 울림으로 우리의 내면을 두드리는 것이다.

종은 오래 전부터 악기의 으뜸이 되고 예식의 엄연한 주인이 되기도 한다. 오직 군주를 위한 궁중악기로서도 최고의 대접을 받기도 한다. 오케스트라의 타악기로서 사용되는 종소리는 그 아름답고 맑은 종소리에 우리는 귀 기울인다. 높은 탑 속에서 울리는 교회의 종소리는 신을 바라보는 인간의 간절한 갈구가 그 속에 숨겨져 있으리라. 종소리는 인간의 마음을 순화시키고 영혼을 맑게 한다. 울림이 없는 종은 방울이 될 뿐이다.

산사를 울리는 청아한 종소리는 어느 수도승의 예불 같다. 수도승은 종의 모습을 닮아가려는 것일까. 내면의 소리를 듣기 위해 스스로 종탁이 되는 것일까. 육신과 영혼을 깨우는 종을 친다. 깨달음을 완성한 부처의 모습을 닮아 가려는 구도자는 미혹된 중생의 속성을 버리기 위해 자신의 종탁을 수없이 쳐야만 하리라. 종소리의 울림처럼 쉼 없이 자신의 맑은 영혼을 만들어 가야 하리라. 산사의 종소리는 어쩌면 불자들이 닮아가고 싶어 하는 부처의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손에 들고 치는 손잡이 종에도 삶의 의미와 추억이 담겨져 있다. 학문의 시작을 알리던 학교 좋은 아직도 내 기억 속의 의미 있는 종이 된다. 작은 추를 몸속에 감추고 우리의 삶과 함께하는 종소리가 때때로 그립기도 하다. 시각을 알리는 시종은 지금도 영원하지 않다고 종을 친다. 옛날, 신호를 보내 위험을 알려주는 경종은 늘 깨어 있으라고 종을 친다. 방심하지 말고 준비하는 삶을 종소리에서 인식한다.

손잡이 종소리에는 현재와 미래를 준비하는 내 모습이 보인다. 손잡이 종소리에 연관된 삶을 살아가는 나는 오늘도 종소리의 길고 짧음에 따라 바빠지기도 하고 깨어 있기도 했다. 세월이 이렇게 많이 흘러왔는데도 나는 간간이 학교 종소리가 듣고 싶어진다. <학교종> 동요는 나의 즐거운 등굣길 동무이었다. 일곱 살 소녀는 새 교실 새 친구 새 선생님, 모든 게 새로운 처음 시작에 눈을 반짝인다. 학교 종소리는 내 꿈이 자라고 있는 작은 텃밭 같았다. 일곱 살 강둑에서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강을 본다. 강물은 동화 속 그림처럼 너무나 맑고 곱다. 강물은 학교 종소리를 기억 속에 담아둔다. 나는 그 강물을 볼 때마다 아직도 배워야 한다는 강한 호기심이 발동한다. 배운다는 것은 내 정신세계에 종을 울리는 것이다.

두부장수 종소리에는 다정한 골목길과 아침 두레상의 추억을 기억하게 한다. 따끈한 생두부를 좋아하셨던 아버지의 기억 때문인지 지금도 두부 만드는 집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이제는 들을 수 없는 추억의 종소리에는 아파했던 세월도 함께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아파하며 성숙했던 지난날들이 따끈한 생두부에 둘러앉던 두레상의 온기 속에서 늘 따뜻해진다. 그리워하는 것은 오랫동안 퇴색되지 않는 그림처럼 내 바람벽에 걸어두고 싶어진다.

하루의 삶이 바람처럼 지나가던 젊은 날의 기억 속에는 청소차 종소리가 남아 있다. 새벽을 깨웠던 청소차 종소리는 삶이란 뛰어가듯 바쁘게 살아야 함을 일깨워준다. 쓰레기를 비우려면 나는 발돋움을 해야만 했다. 키가 작은 나는 늘 팔이 아팠다. 쓰레기가 머리 위에 쏟아지는 날은 괜히 서럽기도 하고 속도 상했다. 그러나 그런 세월도 지금 생각하면 잠깐 꾸고 난 낮꿈 같다. 모으고 또 비우면서 바쁘게 살아야만 했던 지난날이 주눅 들지 않고 신나고 주목받는 종소리를 기다린 것은 아닐까.

살아가다 벽을 만나면 돌아가야 할지 뚫고 가야 할지 망설인다. 간혹 미래의 불확실성은 사람을 나약하게 만든다. 점쟁이는 방울을 흔들며 무슨 생각을 할까. 방울 소리 속에도 뚫고 나갈 길이라도 찾는 것일까. 달랑달랑 흔드는 방울 소리가 꽈리를 틀고 혀를 날름거리는 방울뱀 같기도 하다. 점쟁이는 방울을 흔들어 답답한 마음을 안심시키는 것일까. 유혹 받았던 방울 소리도 내 삶의 한 결이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