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너를 본다 / 서 숙
봄, 보다
봄은 진정 ‘보다’에서 유래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생명은 움직임이다. 봄에 그 움직임이 가장 분주하다. 자연이 펼치는 아름다움에 눈을 떠 삶의 경이로움을 찬탄한다는 의미로 이 계절의 이름이 봄이 되었다고 한다. 겨우내 앙상하던 나무들의 우듬지까지 물이 오르면 먼 산의 나무는 뽀얗게 연두색의 안개 같은 후광을 둘러 잔가지의 윤곽이 어련히 번져나간다. 그러면 물기 머금은 샛바람은 꽃의 향연을 예고하고 세상은 청신한 신록에 포근히 안긴다. 동토를 견딘 나무에 새 움이 트는 정경은 해마다 새롭다. 마냥 겪는 신비다. 모든 생명이 탈바꿈을 할 때, 그 변화를 지켜보는 눈이 있으니, 봄을 맞아 봄을 본다.
본다는 말에는 무한정의 의미가 담긴다. 나는 너를 알고 싶다. 마음을 다하여 이해하고 싶다. 볼 때마다 너는 새롭다. 언제나 처음이다. 아마도 나는 너를 아주 많이 깊이 사랑하게 되었나 보다. 너를 본다. 찬찬히, 오래.
바람, 바라다
세상의 욕망이 충족되면 부산하던 대기는 잠시 움직임을 멈춘다. 그러나 반쪽의 순간은 짧고 새로운 욕망이 새록새록 몰려온다. 대기는 심부름꾼, 안주를 거부하는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들에게 끌려 다닌다. 정착을 모르는 대기 속에서 욕망의 부대낌에 따라 나부끼며 옮겨 다니는 숙명을 지닌 바람은 스스로는 모습을 나타내지도 못하고 다른 존재를 통해서만 실체를 감지하게 한다. 그 얼마나 간절한 바람이기에 형체도 나타내질 못하는가.
오늘은 바람이 세차다. 누군가의 유랑의 갈망이 이리 몰아치나보다. 나는 이 바람을 속절없이 겪어낸다. 휘둘린다. 웃음이었다가 울음이었다가 때로 섬세하게 때로 광포하게 내면을 떠도는 안간힘. 꿈,
우리들 마음의 행로는 이리저리 뒤척이는 바람을 닮았다. 눈에 비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바람은 그래서 은밀한 충동과 자유로운 영혼의 비상과 마지막 세계에의 열망에 대한 환유로 그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 있다. 모든 일탈은 다 바람이다.
바다, 바라보다.
겨울바다를 앞에 두어본 적이 있는가. 폭풍 가운데도 아닌데, 심청색의 퍼런 물빛은 넘실거리며 나를 향해 몸피를 부풀려 시야 한가득 솟구친다. 살아라. 잘 살아라. 열심히 살아라. 시퍼렇게 깨어 있어라. 그렇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겠다. 바다는 으르렁거리며 협박한다. 은빛 날개의 갈매기 끼룩거리고 알 수 없는 기쁨으로 내 마음도 저 높은 파도마냥 한껏 부푼다. 오싹한 희열이다. 희망의 모습은 그래서 늘 겨울바다 저 먼 수평선의 시린 눈부심이다.
‘바다’의 옛말이 ‘바라’라고 한다.
그러니까 바라본다는 것은 바다를 본다는 것이다. 바라본다는 말은 못 가본 곳에 대한 동경과 다다르지 못한 것에 대한 희망과 멀리서 오고 있는 미래에 대한 기대로 우리를 들뜨게 하는 힘을 지닌다.
파도에 씻겨 깨끗한 흰모래, 부서진 조개껍질의 한 살이를 즈려밟고 오래도록 바다 앞에 서서 바다를 본다. 바라본다.
사람, 그리고 사랑
사람과 사랑의 모양이 비슷한 이유가 있다. 사랑이 없으면 무가치한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에게로 나아가고자 한다. 내 속에 들어가고 싶다. 너를 채워 공허함을 지우는 나, 내 안에서 비로소 온전해지는 너. 너를 위해 내가, 나를 위해 네가 존재한다. 그래서 나의 글자 모양은 밖으로 향하고 너의 글자 모양은 안을 향한다. 나의 방향성은 원심력을 지향하고 너의 방향성을 추구한다. 그리하여 나의 유아독존에서보다 오히려 너라는 타자 속에 나는 더 많이 들어가 있다.
사랑이란 나를 벗어난 너에게 닿으려는 마음이다. 우리는 간절하게 사랑이 필요하고 늘 사랑에 목마르다. 나는 한숨지으며 너라는 존재를 행해 그 반향을 기다린다. 네 눈에 비친 나의 모습 앞에서 내가 행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과연 온당한가. 도달할 수 없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절망, 산다는 것.
봄과 바람과 그리고 바다.
모두 구체적인 사물과 현상을 이야기하는데, 그에서 연상되는 ‘보다, 바라다, 바라보다’는 어떤 대상성을 추구하지만 어느 정도 모호한 개념을 내포한다. 그 말들이 인생의 오묘한 추상을 거느린다. 현상에 기대어 관념을 말하는 언어 속에 삶의 지향과 모순이 갈등하며 수군거린다. 진실을 품는다.
그 속에 들어앉아 있는 나와 너, 우리, 사랑하는 사람들.
언어는 꿈꾼다. 오늘도 그리고 또 내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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