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첩장 / 이순형
오늘 받은 청첩장의 봉투에서는 내 이름 빼면 아는 사람이 없다. 혹시 실수나 하지 않을까 걱정에 친구들의 이름을 더듬어보고 각종 사회단체 명단도 찾아보았지만 역시 보이지 않는다. 수소문해서 겨우 알아낸 것이 졸업한 후 한 번도 보지 못한 고등학교 동급생이 보냈다. 그가 누구였는지 기억에 없지만 동창회 명부를 보고 팔이 아프게 봉투를 써 내려갔을 모습을 상상하며 피식 웃는다.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로 청첩장을 자주 받는다. 주말이면 으레 한두 건, 봄, 가을이면 서너 건씨 있을 때도 있다. 대개 나의 애경사에 참석해준 사람들이거나 가끔 얼굴을 마주하는 사이라서 당연히 길을 나선다. 정장을 하면서 오랜만에 친구들과 장난기 어린 농담을 주고받을 생각에 조금은 들뜬 마음이다. 그런데 잘 기억을 못 하겠다는 사람들로부터 청첩장을 받을 때는 얄팍한 봉투에 불평을 한 바가지 버무려 넣거나 다른 사람에게 ‘기본요금’을 대납시키고 만다.
그런 날이면 나의 관혼상제에도 연락을 받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린 사람은 혹시 없었는지 걱정해본다. 그래서 청첩장을 받거나 초상이 났다고 연락이 오면 내가 보관하고 있는 방명록을 꺼내 명단과 금액을 확인해본다. 꼭 따져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는 정이 곧 오는 정이라는데 물가 인상분을 감안하여 조금이라도 더 넣으면 혼주를 만나 잡는 손에 힘이 들어가니 두루 편하다.
화환을 보낼 것인가도 머리 좀 아프게 생각해야 할 일이다. 화환이란 혼주의 세 과시에 도움이 되는 명사가 보내야 격에 맞는다. 별로 대단한 사람이 못 되는 내가 화환을 보내면 받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웬만하면 보내지 않는다. 하지만 나라도 보내지 않으면 예식장에 화환이 전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곳에는 가급적이면 보내는 편이다. 그럴 때면 좀 더 멋진 리본을 달아주지 못하는 나의 현실이 오히려 미안하다.
동창회나 모임을 주선해보면 평소에는 전혀 얼굴을 보이지 않던 회원이 갑자기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모두들 반갑게 맞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그로부터 청첩장이 세금폭탄 고지서처럼 날아온다. 심한 경우 수십 년 만에 보는 자리에서 겸연쩍은 표정으로 청첩장을 꺼내 돌리는 친구도 있다. 신나던 회식자리가 갑자기 화기애매(和氣曖昧)해지고 친구들의 빈정대는 소리가 허공을 맴돈다. 그런 사람은 대개 자기 볼일이 끝나면 다시는 발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고관대작이거나 평소 존경받기만 하는 직업에 있는 사람, 전 직장의 상사들인 경우가 많으니 왠지 씁쓸하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나 영업이 직업인 사람들은 남의 관혼상제에 부지런히 찾아다니고, 선출직에 당선되었거나 출마할 사람들도 역시 낄 데 안 낄 데 구분 없이 잘도 알고 나타난다. 아무래도 사회생활의 필요에 따라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손님도 반가운 사람과 만나서 괴로운 얼굴이 따로 있다는 사실은 모른 체한다.
물론 관혼상제에 오지 않는 사람도 대개 그럴만한 사유가 있다. 예를 들어 자연과학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가 실험실에서 현미경을 들여다보지 않고 여기저기 쫓아다닌다면 어떻게 세계적인 연구 성과를 낼 수 있겠는가. 이 말은 젊어서부터 관혼상제를 챙기지 못해 미안했다는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동경대 교수의 겸연쩍은 고백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관혼상제에 가는 것이 아무래도 품앗이 성격이 강하다. 내가 가는 만큼 온다고 생각하면 적당하고 청첩장도 보낼 만한 곳에만 보내야 한다. 심한 경우, 청첩장을 직접 찾아가 주었어도 오지 않는 사람은 내 청첩장을 쓰레기통에 넣으며 뒤통수에 대고 얼마나 욕을 했을까. 잘 보내면 초대장이 되지만 염치없이 보내면 금액이 명시되지 않은 고지서가 된다. 문제는 보낼까 말까 고민되는 사람인데, 그렇게 애매하면 일단 보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받고 도 안 오면 그만이지만 꼭 올 만한 사람에게 보내지 않으면 자기가 그렇게 소원한 관계냐고 따져 물을 때 당황스럽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대개 속으로는 천만다행이라면서 가슴을 쓸어내리는 엉큼한 속이 보이기는 하여도 나는 사과하는 척한다.
참 어려운 일 중 하나가 청첩장 보내기와 받기다. 사람들과의 가깝고 먼 관계를 나 혼자만의 잣대로 재기는 아무래도 상대가 있어서 여러모로 어렵다.
오늘은 예식장에서 테이블에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친구들의 의견을 모아보니 명답이 나온다.
“늙어 가는데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가끔이라도 얼굴 보려면 열심히 다니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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