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부네 슈퍼 / 구양근
나는 심야의 산책을 즐긴다. 모두가 잠들어 있을 시간에 아내와 손을 잡고 아파트 숲을 걷는 것도 꽤 괜찮은 여유 중의 하나이다. 키 큰 아카시아 잎 사이로 세어 들어오는 불빛을 맞으며 걷는 여름밤은 상쾌하다. 아파트 동棟마다 조금씩 다른 정원수를 감상하며 살고 있는 사람을 생각하는 것은 나를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는 우회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산책은 아파트 사이사이를 걷기도 하지만 길 건너 주택가를 걸으며 아담한 단독주택을 만나면 우리도 저런 집을 갖자고 설계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산책을 끝내고 돌아올 즈음에 아내가 나온 김에 필요한 것들을 좀 사가자고 한다. 마침 눈앞에 "흥부집"이라고 써진 슈퍼마켓이 보여서 무작정 들렀다. 필요한 것들을 주섬주섬 골랐더니 점방 아저씨는 비닐봉지 둘에 나누어 담아서 준다.
"이것은 사모님이 들고, 이것은 사장님이 드세요."
그런데 우리는 각각 하나씩 봉지를 받아 들고는 상당히 의아하였다. 아내가 먼저 고개를 갸우뚱한다. 아내가 든 봉지는 무겁고 내가 든 봉지는 과자 부스러기나 있는 아주 가벼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반대 아닌가? 남자가 무거운 것을 들어야지…. 우리가 그러고 있는 사이에 흥부네 아저씨는 자기의 농弄이 들어 먹혔듯이 우리를 보고 빙긋이 웃지 않는가. 그때야 그가 농을 한 것을 알고,
"이 아저씨 재밌는 사람이네!"
하면서 첫 농담을 우리도 흔쾌히 받아들이고 친해지게 되었다.
그 뒤로 밤에 산책을 나오면 으레 흥부네 슈퍼를 들러 가는데, 그 집 아저씨의 태평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외모는 천하에 무골호인의 촌사람인데다 어느 달관한 바보(?)임에 틀림없다. "흥부집"이라는 이름은 누가 그 아저씨를 보고 걸맞다고 지어줬는지 아니면 점방 이름이 흥부집이니 일부러 흥부짓을 하는지 모르겠다.
거기서는 물건을 잘 골라야지 아무거나 가져와서는 큰일이다. 야채 같은 것은 완전히 신선도를 잃고 축 처져 있는 것이 쌓여 있는가 하면, 키위 같은 것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물렁물렁해서 손으로 확인해 보기가 민망할 정도이다.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그리고 이 지역이 어떤 지역인데 이렇게 살아가고 있단 말인가?
어떨 때 가끔 재수 좋을 때는 갓 들어온 싱싱한 야채나 과일을 만날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어느 곳보다도 재미를 보게 된다. 그런데 이 아저씨, 어안 중에 할인까지 해준다. 계산기를 두들기면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게 복창을 한다.
"이것은 얼마인데 몇 프로 할인하면 얼마, 이것은 얼마인데 몇 프로 할인해서 얼마…. 합계 얼마, 또 이 우수리는 떼어버리고…."
몇 푼 되지도 않는데 그렇게 할인해 버리면 남을 것 같지도 않은데 할인은 철저한 자기 철학이다. 낮은 아주머니가, 밤은 아저씨가 맡아서 점방을 지키는데 하루도 문을 닫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서울에서도 가장 빠릿빠릿한 사람만 산다는 강남 한복판에 이런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점방이 있다는 것은 스트레스가 해소돼서 좋을 일이다.
이제 흥부 아저씨와는 느긋이 이야기하는 사이가 되었다. 물건을 사서 나올 때 그가 하는 고정 인사가 있다.
"좋은 밤 되세요."
그리고 그의 입에는 "사장님" "사모님"이 입에 달려 있다. 어느 날은 우리가 물건을 다 골라서 카운터까지 나오는데도 여느 때 같지 않게 텔레비전 동물영화에 정신이 팔려 있다. 내가 동물영화를 좋아하느냐고 묻자,
"저는 KBS 5시 20분 "재미있는 동물의 세계"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봐유."
나는 그가 나와 취미가 같은 것에 동지의식을 느꼈다. 나도 동물의 세계 프로는 아주 좋아하기 때문이다.
자기는 이곳 토박이란다. 이곳이 아직 개발되기도 전부터 살고 있었다는 것이고, 여기가 개발되기 전인 30여 년 전만 해도 여기는 배 밭이었단다. 하얀 배꽃이 만발할 때면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옆 마을은 사평이었고 그 옆 마을이 산촌이었단다. 배 밭이 있기 전, 조선조 때는 "장자말"이라고 해서 부자들이 사는 마을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고 이곳의 역사도 줄줄이 꿰고 있었다. 그래서 아내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이 건물은 아저씨네 것이세요?"
"아니유."
"그럼 이 점방은…?"
"세 얻은 것이여유. 제가 이런 점방을 가지고 있으면 부자게유."
그러고 보니 이 아저씨의 말투가 분명한 충청도 말씨다. 이렇게 느리고 이렇게 태평이니 아직 점방하나도 갖지 못했지. 그 아저씨가 좀 원망스럽기도 하고 빠른 걸음으로 오가며 눈 반짝거리는 사람이 밉기도 하였다.
이렇게 착한 사람이 잘 사는 세상이 되어야 할 텐데 어쩐지 그럴 것 같지가 않다. 어느 날 건물 주인이 비워달라고 하지나 않을까 나는 항상 마음 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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