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실(胎室) / 박시윤
가을볕을 받으며 태실에 오른다. 세종대왕 대군들의 태(胎)가 봉안된 곳이다. 여기는 내 마음의 시름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때 혼자 조용히 다녀가는 영혼의 정화구역이다. 풍수에서는 태실을 두고 새끼를 잉태한 어미의 자궁과도 같아서 사시사철 좋은 기氣가 흐른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태실을 다녀간 한동안은 고른 숨을 쉴 수가 있었다.
오늘은 혼자가 아니다. 돌배가 아들과 함께 왔다. 태초부터 태를 사이에 두고 나와 한 몸이었던 아이 아니던가. 넘어지고 울고, 기어가고 웃고 아이는 매 순간 표정과 감정을 달리하며 세상을 향해 돌계단을 오르고 있다. 오래된 소나무 그늘은 아이와 나의 몸이 들어서기에 충분하다. 나직하게 드리워진 산길의 안개가 가을이 깊어 감을 말해 준다. 키 작은 구절초의 군락에서, 촘촘히 쌓아올린 돌탑의 무덤에서 아이가 잠시 쉬어가자 함은 제 걸음이 아직도 미치지 못하는 높은 곳에 대한 다부진 욕심일지도 모른다. 바람이 지나자 꽃도, 햇살도 아이를 향해 돌아앉는다.
태봉(胎封)은 햇살들의 천국이다. 겨우 258m에 불과한 야트막한 봉우리임에도 도착하자 총총걸음에 아이의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다. 머리를 쓸어주고 물 한 모금을 먹이자 이슬을 털고 일어난 풀처럼 아이는 내 손을 놓는다. 자신만의 세상으로 천진난만하게 뛰어가는 아이 앞에 600년 세월 동안 고이 잠든 세종과 대군들의 태봉이 기지개를 켠다. 모두 일으켜 술래잡기라도 할 기세다. 아이는 경계석 틈을 기어들어 태봉 사이사이를 요란스럽게 뛰어다니기도 하고, 때로는 가벼운 입맞춤도 한다. 제 집 드나들 듯 햇살과 아이의 익살스런 웃음이 한데 버무려져 태실의 고요를 깨운다.
얼마 전부터 아이는 자신의 몸을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배에 남겨진 탯줄의 흔적을 당겨도 보고, 쿡쿡 쑤셔도 본다. 올해로 열 살이 된 큰아이도 그러하다. 요즘 부쩍 배꼽에 대해 질문이 많아졌다. 그럴 때 나는 잘 말려둔 탯줄의 일부를 가져와 보여준다. 아이와 내가 육체적으로 연결되었던 끈이라고, 배꼽이 떨어질 무렵 두 아이는 유난히 배꼽앓이를 심하게 했다. 세균 감염에 의한 육아종과 피고름으로 병원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렸다. 참외배꼽처럼 볼록하게 마무리된 작은아이의 배꼽이 요즘도 잦은 배앓이로 연결되어 나의 애를 태우는 것도 어쩌면 태를 귀히 다듬어주지 못한 나의 불찰이었는지도 모른다.
왕실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깨끗하게 자른 태를 길한 방향에서 길어온 물에 수차례 씻고, 마지막 단계에서 따뜻하고 향기 나는 술로 헹구어 길한 방에 모셔둔 후 길일과 길지를 택해 태실에 봉안했다고 한다. 그래야 태의 주인이 복을 받고 무병장수한다는 풍수적 믿음을 굳게 행했다. 태는 인간 생명의 출발지와도 같아서 생명의 근원이 태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리라. 태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하늘이 만물을 낳는 데 있어 사람으로 태어남을 귀히 여기며 사람이 날 때는 태로 인하여 장성하게 되는데, 하물며 인간의 어짊과 성스러움이 모두 태에 매여 있으니 태를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었던 게다.
기단석이 보인다. 전체 19기 중 14기는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은 연꽃잎이 새겨진 대석을 제외하고는 모두 훼손되었다 한다.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에 등극한 세조의 태가 여기 묻혀있음을 안 예조판서 홍윤성이 비를 세우긴 했으나 세조를 미워한 백성들이 오물을 퍼붓고 훼손하여 지금은 비문조차도 알아볼 수 없다. 역사의 피비린내 속에 형제애, 가족애마저 상실한 듯해 서글픔이 인다.
태실 한 귀퉁이에 외롭게 세어진 단종의 태봉 앞에 아이가 머무른다. 열두 살에 왕이 되었으나 열일곱에 세조에게 사약을 받기까지 한 많은 인생을 살다 간 단종이었다. 가장 순수하여야 할 태실마저도 세파에 밀려 홀로 서 있다. 아이가 단종의 태봉을 맴돌다 햇살처럼 환하게 웃는다. 오랜 세월 서럽고 외로웠을 수많은 시간을 역사의 뒤란으로 밀어두고, 지금 작디작은 아이의 눈 속에는 단종의 빛이 가득 머물러 있다. 아이의 몸짓은 성군이 되어 세상을 성대히 이끌어 보겠다는 굳은 의지를 품은 듯 조금의 거리낌도 없다. '이곳은 나의 세상이다. 여기 자리한 모든 생명과 만물들은 나의 백성이요, 나의 피와 살이 되어 나를 성군으로 이끌 것이며, 나 또한 그대들을 위해 평생 귀와 마음을 열어둘 것이니 나는 그대들이 원하는 큰 세상이 될 것이다.'
문득 두고 온 큰아이 생각을 하게 한다. 10년이나 홀로 자라다가 얻은 동생에게 아낌없이 제 사랑을 다 내어주는 아이다. 나는 얼마나 뜨겁게 형제애를 훈육하고 있는가. 나와 남편이 인생의 무대에서 물러날 즈음에도 이 두 아이의 형제애는 식지 않으리라. 한참 머리가 커가는 큰아이도, 이제 겨우 젖을 땐 작은아이도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리라 믿는다.
친정어머니는 나를 종가의 셋째로 낳고도 계집으로의 천대를 피해, 태를 이른 새벽 첫 아궁이 불에 삼 일을 태웠다고 했다. 그리고 그 재를 집안의 수호신인 아름드리 감나무 밑에 묻으며 복을 빌었다 한다. 동물도 새끼를 낳고 제 몸에서 흘러나온 태를 먹어 다시 제 몸으로 환원을 시킨다. 하물며 사람인 나는 두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면서 태를 어떻게 하였던가.
열 달의 잉태와 긴 산고 끝에 아이의 첫울음이 세상 문을 열었다. 뒤이어 물컹하게 쏟아져 내리던 어떤 덩어리의 이물감, 누군가 다급히 양동이에 떨어진 그것을 들고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나는 내 몸의 태, 아이들의 태르 찾고 싶었다. 태맥이 살아 뛰는 잠시의 순간도 기다려주지 못하고 숨 가쁘게 이어지는 날카로운 가위질로 한 몸을 두 몸으로 갈라놓을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 어디로 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도 모를 태가 궁금한 날에는 이렇게 조용히 태실을 찾는다.
태실에서 내려다보이는 작은 댐의 물결이 양수처럼 고요하다. 거대한 태양을 품고도 잔잔함을 잃지 않으며 눈부시게 태실을 비춘다. 사방 천지가 산들로 휩싸여 비바람에도 아늑함을 잃지 않는 태실은 영락없는 어머니 뱃속이다. 태는 우리가 돌아가야 할 가장 순수한 고향인지도 모른다. 욕심도 없고 부와 명예도 모르는 태초의 가장 아름답고 때 묻지 않은 영혼의 고향. 태실은 선석산 봉우리에서 탯줄 즉 한 줄 명당 혈이 내려와 자궁 안에서 태아가 자라는 기세여서 오래 머무를수록 좋은 기를 많이 받는다 한다.
한참을 쉬지 않고 몸을 놀리던 아이가 명당의 기를 받은 것인지 아늑함에 취한 것인지, 잠에 겨워 눈을 비비며 하품을 한다. 아이를 안고 단종의 태봉 앞에 등을 기댄다. 눈 돌리는 곳마다 고요한 바람과 햇살들이 가득하다.
아! 쏟아지는 나른한 잠에 취해 나도 잠시 명당의 기운을 느끼며 눈을 감는다. 세상이 눈앞에 펼쳐져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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