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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3일 간의 원초적 삶 / 김인숙

3일 간의 원초적 삶 / 김인숙  

 

 

 

얼굴이 따사로웠다. 살며시 눈을 뜨니 따뜻한 아침햇살이 방 안 가득이다. 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린다. 이제 내가 정신이 드는가?

4일 전 일이다. 아무데나 눕고 싶고 몸이 나른했다. 또 몸에 반란이 일어나려나? 잠시 쉬어가라는 신호 같아 일찍 자리에 누웠지만, 열이 오르며 온몸이 쑤셔왔다. 편도가 또 말썽부리려나 보다. 이러기 시작하면 목안 전체가 부어오를 것이다. 집에 혼자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두렵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내가 아프다고 알리고 싶은데, 떠오르는 사람은 오직 돌아가신 내 어머니뿐이었다. 요즈음은 수시로 부모님 생각이 난다. 나이를 먹으면 어린애가 된다더니, 나는 얼른 성호를 긋고 성모님을 입속으로 불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갈증을 심하게 느끼며 잠에서 깨었다. 온몸은 얼음에 싸여 있는 것처럼 추웠고, 걷잡을 수 없이 몸이 떨렸다. 그새 후두까지 부어올라 침을 삼킬 수도, 숨을 쉴 수도 없었다. 불덩이 같은 내 몸을 식혀야 하는데, 열만 내리면 이렇게 고통스럽지 않을 텐데…….그렇다고 말짱한 정신으로 119구급차에 실려 가긴 싫었다. 그때 아스피린 생각이 났다. 2알을 물에 녹여 겨우 삼키고 이마에 찬 물수건을 얹었지만, 나도 모르게 끙끙 앓는 소리가 나왔다.

그렇게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4일째 아침이 된 것이다. 완전히 열이 내리지 않아 입술은 말랐지만, 정신은 차릴 수 잇었다. 그러니까 나는 21세기 문명 속에서 비문명인으로 3일을 산 것이다. 내 곁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를 도와 줄 누군가도, 고통을 덜어줄 약도, 병원으로 이동할 차 같은 것도 없었다. 물론 환자가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내가 거부한 것은 아니다. 그저 캄캄한 적막 속에서 갈증이 느껴졌고, 입이 마르면 물을 마셨다. 아주 원초적인 것만 해결했을 뿐, 열에 들떠 앓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문명 이전, 그들이 몸을 추슬러 거쳐 밖으로 나왔듯이, 나도 혼자 몸을 추스르고 견디어 4일 만에 창문을 열었다. 공기가 좋았고 바람이 좋았다. 몇 달이나 지난 것처럼 감격스러웠다. 고개를 돌리니 건너편 창에 비친 내 모습이 가관이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휑한 두 눈, 내 얼굴 위로 성별을 알 수 없는 비문명인 한 명이 겹친다.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비비꼬아 대여섯 가닥을 앞으로 내려 봤다. 이마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다리가 휘청거리며 눈앞이 아물아물 흐려왔다.

남편에게 혼자 살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었다. 서로가 미리부터 혼자 사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목울대를 돋우었다. 다가올 시간보다는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며 살리라, 그렇게 작정을 하고 서울로 혼자 왔었다. 그러고는 팽팽히 조율되어 있었던 내 마음의 줄을 남김없이 풀었다. 오직 나만의 시간을 만들며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내 마음에 드는 가구를 사고, 내 취향대로 집안을 꾸미고, 항상 부드러운 음악이 흐르게 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방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는 것이 즐겁고 달콤했다. 사람들이 비웃겠지만 혼자여서 행복한 여인이 되었다.

3 년이 지나고 4 년이 되어간다. 읽었던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작품 속에서 작가와 만나는 즐거움도 심드렁해졌다. 읽는 이가 없는 함량미달의 글을 왜 써야 하는지 그것도 자신이 없어졌다. 허나 혼자 살 수 있다고 큰소리쳤기에, 외로움도 혼자 삭여야 한다. 외로움이사 항상 나와 함께 해 오지 않았던가. 새삼스러울 것도 없을 것.

라디오 FM을 눌렀다. 아름답고 경쾌한 리듬이다. 나는 오솔길을 걸으며 시냇물 소리를 듣는다. 내 감정은 맑아지고 그 하모니는 내 영혼을 편안함으로 이끈다. 독일 시인 실러는, 시간은 세 가지의 걸음걸이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주저하면서 다가오는 미래, 화살처럼 날아가는 현재, 그리고 멈춰 서서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 과거가 있다고 말했다.

시간은 지금도 나의 생각들을 훑으며 화살처럼 날아가고 있다. 문명이 숨 쉬는 병원으로 발걸음을 옮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