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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슬픈 타조 / 류영택

슬픈 타조 / 류영택


 

 

정자는 내가 옆에 있는 줄도 모르고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나는 수를 헤아리듯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차며 서 있는 정자의 어깨를 툭 쳤다. 정자는 화들짝 놀란 모습으로 고개를 돌린다. 왜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느냐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나는 손으로 숟가락질 시늉을 해 보인다. 정자는 그제야 점심시간인 것을 알아챈 모양이다.

베틀을 세우고 씨익 웃으며 현장을 빠져나가는 정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금방 정자가 기대어 섰던 베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는다.

정자에게는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잠시 졸다 조용해지면 베틀이 섰다는 것을 알지만, 정자는 베틀에 기대서서 진동으로 알아차린다.

오래 전 정자가 처음 내 책상 앞에 다가오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 속에 가슴이 아린다. ‘개 조심푯말이 붙은 대문을 들어서는 아이처럼 정자는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살금살금 다가왔다. 나무젓가락처럼 삐쭉한 키에 생머리를 깡충 말아 올려 긴 목이 더 길어보였고, 쌍꺼풀진 커다란 눈은 자그마한 얼굴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정자는 손에 들린 누런 골판지 종이를 책상위에 올려놓는다. '고장 났어요글씨를 써내려가는 손이 가늘게 떨고 있다. 골판지를 바라보는 내 시선이 정자의 시선과 마주친다. 정자의 얼굴이 홍시같이 발갛게 변해간다. 짧은 침묵이 흐른다. 정자는 무안한지 허둥대며 얼른 자리로 돌아간다.

당황해 하는 내 모습을 지켜보던 동료기사가 귀띔을 해준다. 정자는 말을 못 한다고 한다. 늘 종이 상자를 찢은 누런 골판지를 베틀위에 올려놓고 무슨 일이 생기면 글로 적는다고 한다. 베를 짜는 남자 직수를 본 적은 있지만 말 못하는 직수는 정자가 처음이다.

나는 책상 위에다 연습장을 갖다놓았다. 정자는 연습장에 글을 쓰기가 쑥스러웠던지 책상 주위만 맴돈다. 그 모습이 마치 물속에 드리워진 미끼를 보고 바로 달려들지 못해 몸을 슬쩍 갖다 대며 주위를 맴도는 물고기 같다. 나는 정자가 제 스스로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첫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정자는 백지 연습장에 고장글씨를 적어 놓고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힌다. 나는 정자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해 몇 호 베틀 고장?’ 일부러 말을 붙인다. 정자는 여전히 얼굴을 붉힌 채 내 물음에 답한다. 씽긋 웃는 정자의 모습이 한결 편해 보인다.

야간 작업시간, 졸고 있는 다른 직수들과 달리 정자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나를 한참 쳐다보던 정자가 연습장에 무언가 써서 내민다.

어쩌다 얼굴이?”

정자는 화상을 입어 멍게처럼 울긋불긋한 내 얼굴을 안쓰러운 듯 바라본다. 나는 얼굴을 잊은 채 살고 싶어 거울을 안 본다. 눈치도 없이 내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 정자가 조금은 야속하다. 나는 애써 표정을 감추고 답한다.

오리 구워먹다 휘발유 뒤집어쓰는 바람에...”

정자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뜨악한 표정을 짓는다.

정자는 신체장애 때문인지 살아오면서 험한 일을 많이 당해서 그런지 쉽게 사람을 믿지 못한다. 정자가 내게 마음을 연 것은 말 못하는 자신의 아픔보다 화상을 입은 내 얼굴이 안 돼 보여 감싸주고 싶은 따스한 마음이었다.

 

정자는 장애를 안고 살아오면서 겪어야 했던 말 못하는 사연을 이야기했다. 이야기 도중 눈물을 글썽이는 정자의 슬픈 눈을 볼 때마다 내 눈도 흐릿해져 왔다. 분위기를 바꿔주려고 내가 웃기는 이야기를 하면 알 수 없는 손짓으로 자지러지는 정자의 모습에 간장이 녹아내리는 슬픔을 속으로 삭였다. 나는 낙서로 빼곡히 채운 연습장을 갈아 끼운다.

며칠 전 정자의 남자 친구가 공장에 왔다. 그 친구는 정자처럼 말을 못하는 학교 동창이다. 돈을 모으면 전세방을 얻어 살림을 차릴 거라며 가끔 내게 이야기 했던 친구다. 정자는 베틀을 돌려놓고 시간만 나면 남자 친구의 꾸리실 감는 것을 도와주었다. 정자는 실 감는 일에 정신이 팔려 한참 후 자신의 베틀에 돌아오면 흠이 한 판이나 들어가 있었다. 애써 짜 놓은 베가 못 쓰게 됐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딱하다는 생각뿐이었다.

하루는 베틀이 다 서있는 데도 정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실을 감던 남자 친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불 꺼진 원사창고, 원단을 검사하는 검단실, 젊은 남녀가 갈만한 곳을 다 뒤졌지만 현장에는 없었다. 남자의 기숙사 방문을 열었다. “어버, 어버!” 남자 친구를 붙들고 정자가 울고 있었다. 힘들어 도저히 일을 못하겠다며 가방을 싸는 남자 친구의 다리를 붙들고 우는 정자의 모습을 보니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남자 친구가 떠난 후 혼이 빠진 사람처럼 한동안 넋을 놓고 있던 정자가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마음이 안정되었는지 표정이 밝아 보였다. 정자는 씽긋 웃었다. 나는 턱짓을 했다. 정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자는 긴 잠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오늘은 무슨 생각을 했기에 내가 옆에 서 있는 줄도 모르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을까. 떠난 남자친구 생각을 하는 건 아닐까.

나는 정자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맺힐 때마다 마음이 동해서 부둥켜안고 엉엉 울어주고 싶다. 하지만 가슴으로만 아파할 뿐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다. 혹시나 때를 놓칠까봐 정자에게 밥 먹는 시간을 알려주는 게 전부다.

회사를 그만두던 날 현장을 나올 때 정자를 바라봤다. 정자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등을 돌렸다. 나는 정자의 뒤에 잠시 두 걸음 시간만큼 서 있었다. 그것이 정자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오랫동안 글로써 나누었던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정자는 정상적인 사람에게는 마음을 열지 않았다. 손만 내밀면 자신의 손을 잡아줄 사람이 분명 있었는데도 끝내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장애를 가진 사람은 처지가 같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것인지. 어느 것이 더 좋다고 섣불리 말하지 못한다. 하지만 말을 않고도 말이 통하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그것을 알면서 애써 마음을 닫아야 했던 정자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가끔 정자를 생각한다. 잘 살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싶지만 커다란 눈을 껌뻑이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정자의 모습이 타조의 슬픈 눈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