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 한 포기 / 김신희
들머리, 길 왼쪽으로 너른 콩밭이다. 논둑에도, 차의 왕래가 잦은 도로의 둔덕에도 콩 포기가 촘촘하다. 가지마다 콩 열매가 조랑조랑, 가을볕에 포만함으로 살포시 눈을 감고 있다.
나는 한 모숨에 들 것 같은 담숙한 콩 포기를 쑤욱 뽑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아마도 그건 콩 포기를 감싸고 있는 땅속의 포슬하고 싸한 흙냄새가 그리워일 게다.
한 뼘 땅도 놀리는 것을 용납지 않았던 어머니, 어머니도 매해 사래긴 밭에 콩을 심었다. 농사꾼의 딸인 것을 내 어찌 잊을까마는 콩밭을 보는 것으로도 가슴이 뭉클한 것을 보면 태생적 본성을 속일 수는 없는 것인가 보다.
어찌 콩밭뿐이겠는가. 들은 생명을 품어 희망을 잉태하는 어머니의 품인 것을……. 그러하기에 언젠가 돌아와 안기고 싶은 내 그리움의 원천같은 곳이기도 하다.
콩밭 초벌매기를 할 때쯤이면 콩 싹이 막 올라와 있는 터라 어머니는 콩 싹 하나라도 밟힐세라 여간 신경 쓰는 게 아니었다. 어쩌다 싹을 밟아 낭패감으로 안절부절못하시던 어머니 모습이 선하게 떠오른다.
그렇다면 한여름 콩밭 매기는 수월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힘들지 않은 들일이 어디 있을까마는 시기적으로 콩이 정강이까지 올라올 때라서, 우북한 콩 포기 사이를 엉거주춤 허리를 구부려 풀을 뽑아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온 어느 저녁나절, 갓 퍼 올린 물을 가지고 콩밭 매는 어머니를 찾아 갔을 때의 일이다. 어머니는 시원한 물을 가지고 나타난 나를 반기며, 철들었다고 좋아하셨다. 그러나 내게서 물병을 건네받은 어머니가 그만 물병을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순간 나는 물병을 재바르게 주워 올리느라 본의 아니게 콩 포기를 밟았다. 쓰러진 콩포기를 발견한 어머니는 "저런! 콩 포기가 주저앉아 버렸네, 쯧쯧!" 하시면서 콩밭으로 들어서더니 "너도 한 목숨인데 얼른 일어서거라!" 하시는 게 아닌가. 어머니는 콩 포기를 세워서 흙을 추어올려 꼭꼭 밟아 준 후에야 허리를 펴셨다. 너른 콩밭에 콩 한 포기가 무슨 대수라고. 나는 퉁명스럽게 "엄니, 물부터 마셔야지요." 하였다.
사실 물병이 떨어진 쪽은 우리 밭이 아닌, 우리 콩밭과 이웃한 콩밭이었다. 그러나 남의 밭이어서가 아니었을 터, 다만 시원한 물로 어머니의 더위를 식혀드려야지 하는 내 바람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이었을 게다. 그런 내 마음의 섭섭함도 잠시, 어머니가 일으켜 세운 콩 포기를 보면서 왠지 마음이 누그러지면서 흔쾌했다. 아마도 나는 어머니에게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풀 한 포기도 '숨 쉬는 목숨'으로 보는 어머니의 따뜻함과 사랑을 깨닫고 있었으리라.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어야 함을 말이다.
어머니의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그 '한 목숨'의 의미로 집약되는 것처럼, 생명에 대한 어머니의 배려는 깊이 기울이는 애정의 소산이며 필연적이었다. 어머니에게 있어 그것은 또 대화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어느 것 하나 하찮은 것이 있을 수 없다고 하는 어머니의 따뜻함이 콩 한 포기의 생명, 콩 한 톨의 소중함으로 내 작은 들판에 파종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상을 벗어나고 싶을 때 나는 훌쩍 집을 나서곤 한다. 들에 서면, 생명을 가진 자연의 기운이 가슴으로 밀쳐드는 걸 느낀다.
쌀 한 톨, 밥 한 그릇에 하늘과 땅과 사람이 들어 있다는 지혜를 터득한 것도, 이 들에서 어머니로부터 보고 느낀 최초의 학습 때문이었으리라. 어머니는 아실까. 오로지 농사꾼이었던 당신의 딸로 태어난 것을 내가 얼마나 행복해 하고 있는지를……. 저 들의 낟알들처럼, 아니 콩 한 포기의 삶처럼, 아직도 나는 내 삶이 여물기를 갈망하는 현재진행형인 것에 감사한다.
나는 오늘도 어머니가 그토록 애지중지하셨던 그 삶의 터전, 들길을 걸으며, 어머니의 품, 대지를 느낀다.
'수필세상 > 좋은수필 3'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필]짚신 짝 하나 / 이규태 (0) | 2017.05.28 |
---|---|
[좋은수필]자객 / 김은주 (0) | 2017.05.27 |
[좋은수필]슬픈 타조 / 류영택 (0) | 2017.05.25 |
[좋은수필]콩나물을 키우며 / 변해명 (0) | 2017.05.24 |
[좋은수필]3일 간의 원초적 삶 / 김인숙 (0) | 2017.0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