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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짚신 짝 하나 / 이규태

짚신 짝 하나 / 이규태

 

 

 

할머니가 바구니를 끼고 남새밭에 오갈 때마다 손을 잡거나 치맛자락을 붙들고 곧잘 따라다녔었다. 언젠가 할머니는 길가에 버려진 짚신짝 하나를 주워들었다. 너덜너덜 해지도록 한창 신다가 버린 것이었다.

어린 마음이지만, 그렇게 해진 짚씬짝 따위를 주워드는 할머니가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할머니가 쥔 나의 손을 살며시 잡아 빼고 짚신짝을 들고 걷는 할머니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걸었던 생각이 난다.

우리 집이 가난하긴 했지만 헌 짚신짝이 아쉬울 만큼 가난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그 헌 짚신짝이 꼭 쓸모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할머니는 길가에 버려져 있는 새끼도 도막을 보건 또 구겨서 버린 종이 조각을 보건, 빈 병 하나를 보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그 해진 짚신의 올을 낱낱이 풀어 부드럽게 손으로 비빈다. 그 체온이 스민 검불을 개집 속에 포근하게 깔아주는 것이었다.

주워 온 것이 종이 나부랭이면, 접은 주름을 깨끗이 펴 네 겹으로 접어서 뒷간 문짝 틈새에 꽂아 둔다. , 주워 온 것이 빈 병이면, 꽃 밭 둘레에 거꾸로 묻어 경계를 만들어 나간다. 주워 온 빈 병만으로 나란히 묻어 나가기에 우리 집 꽃밭 경계는 항상 미완성이었다.

우리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맑은 물이 흐르는 내가 있었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그 내에 가서 빨래를 하는 법이 없었다. 초벌 빨래는 반드시 샘물을 퍼서 하고, 빨고 난 빨래를 헹굴 때만 냇물을 이용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빨래에서 빠진 땟국물이 아까워서였다. 그 빨고 난 오수는 반드시 두엄터에 버림으로써 거름으로 보탰던 것이다.

비단 우리 할머니뿐만 아니라 옛 우리 할머니, 어머니들은 그것이 전혀 쓸모없는 지푸라기 하나, 물 한 바가지라도 버리는 법이 없었다. 그 전통적 습성을 우리 할머니가 대행했을 뿐이요 내가 그것을 최후로 목격했던 것뿐이다.

장날이면 우리 마을 숲길로 눈깔사탕 장수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기 마련이었다. 나는 이 날이 가장 신나는 날이었다.

이 숲길 동구 밖에 앉아서 멀리 고갯길을 넘어오는 눈깔사탕 장수를 기다린다. 아물아물 보이던 눈깔사탕 장수가 넘어오면 쏜살같이 집에 달려가서 할머니에게 알린다. 할머니는 작은 되로 겉보리를 한 되 퍼 담아 들고 가서 눈깔사탕 여남은 개와 바꿔온다. 이렇게 사 와서는 나의 키가 닿지 않은 선반 위에다 사탕을 올려놓는다. 심부름을 하거나 할머니 하는 일을 돕거나 하면 눈깔사탕 하나를 내려 주는데 그 하나도 통째로 주는 법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다 빠지고 몇 개 남지 않은 치아로 눈깔사탕을 반으로 쪼개느라 오만상을 다 찌푸린다. 그 찌푸린 얼굴을 보고 나도 따라 얼굴을 찌푸리고 있으면 쪼갠 반 쪽만 주고 반 쪽은 다시 선반 위에 얹어 놓곤 하셨다.

또 할머니는 새 연필을 사 줄때면 반드시 이제까지 쓰던 연필을 가지고 오라 시켜, 그 길이가 새끼손가락 길이보다 짧아졌는가를 재어 본 다음에야 사 주었던 기억도 선하다.

물자가 부족해서거나 성격이 인색해서 눈깔사탕을 반으로 쪼개고, 연필 길이를 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자를 아껴야 한다는 전통적 가치가 할머니를 통해 평범하게 발로된 것뿐이다.

요즈음 아이들이 울긋불긋한 눈깔사탕을 한 통씩 한 봉지씩 들고 먹는 것이며, 필통 속에 십여 자루의 연필을 담아 들고 다니는 것이 그렇지 않았던 나의 경우에 비겨 보다 나은 가치를 형성했다고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버리지 않고 아낀다는 이 전통적 가치를 체험한 나에게, 오늘날의 버리는 문화와 낭비의 문화는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얼마 전 고장난 고물 냉장고를 어떻게 버리느냐를 두고 아내가 고민하는 것을 보고 나는 머리가 아찔해지기까지 했다. 헌 짚신 짝을 줍는 것과 헌 냉장고를 버리는 이 아찔한 공백을 동시대의 나 혼자서 감당하기가 너무 벅찼기 때문이다. 이 공백만큼 현대인은 병들고 있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