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과 가위 / 정경자
소일거리로 운영하는 탕제원엔 칼이 많다. 칡뿌리 자르는 무쇠 칼, 호박을 자르는 큰 칼, 중간 칼, 과도, 택배 보낼 때 쓰는 문구용 칼까지 셀 수 없이 다양하다. 그 쓰임새도 제각각이라 하나라도 없으면 일에 지장이 있을 뿐 아니라, 마음조차도 께끄름하다.
나에게 칼이란 수족과 같은 존재다. 칼이 잘 들어야 일에 속도가 붙고 신이 난다. 칼날이 무뎌지면 일이 힘들 뿐만 아니라 하루 일과도 꼬인다. 시간 날 때마다 칼을 갈아서 손님 받을 채비를 하곤 한다.
남편에겐 가위가 재산이다. 가게 한쪽 벽면엔 가위가 종류별로 걸려있으면서 또 욕심을 내는 것도 일종의 직업병이 아닐까 싶다. 정원수용 전지가위부터 위시하여 꽃꽂이용, 철사절단용, 리본 자르는 재단용, 핑킹가위까지 크기대로 걸려 있다. 차의 짐칸도 그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한 달에 한두 번은 남편이 대형 마트에 동행한다. 심성이 특별히 자상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필요한 것을 얻고자 함은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쇼핑카트를 밀던 남편이 홀연히 사라졌다 나타나면 어디로 갔었는지는 카트를 보고 짐작한다. 가위 두 개가 담겨져 있다.
남편은 수년 전, 큰아주버님이 하시던 꽃집을 물려받았다. 가게 규모는 작지만 남의 손에 넘기기 아까운 목이라 동생을 불러들인 것이다. 아주버님은 꽃집을 하던 노하우를 살려 조경 사업을 시작했다.
남편은 꽃 배달 외에도 제법 규모가 충실해져가는 조경 일도 도와야 했다. 인력시장의 인부들을 공사 현장으로 태워 가고 관리감독하거나, 차떼기로 나무를 사러 외지로 다니기도 했다.
생존의 터전에도 가지치기처럼 먼저 솎아내지 않으면 내가 잘릴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가위는 알고 있었을까? 가끔은 품삯만큼 움직이지 않고 술버릇마저 고약한 일꾼 때문에 남편이 난감하기도 다반사였다. 좁은 동네가 그렇듯 그 일꾼의 어려운 처지를 뻔히 알면서도 남편은 형님을 대신하여 악역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날은 남편의 술자리도 유난히 길었다.
서로 반목하여 날을 세우면 칼과 가위는 무기가 된다. 긴 세월을 함께 했던 만큼 남편이 미워서 날을 세운 적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아이들이 잠든 야심한 시각, 아파트 주차장은 부부의 전쟁터였다. 잔소리 같아서 할까 말까 망설였던 말들은 가슴속에 빼곡히 들어차서 독을 뿜어댔다. 꼬깃꼬깃 구겨졌던 그것들은 입 밖으로 화살이 되어 남편에게 쉴 새 없이 날아갔다. 칼날이 도마를 두드려대듯 남편을 들볶았다. 당최 술을 못하는 나였지만, 때론 술기운을 빌어 칼로 무 자르듯 끝을 볼 작정으로 그의 가슴에 생채기를 냈다. 그래봤자 번번이 독백으로 끝나는 싱거운 전투였다.
"됐다. 고마 해라."
한참 듣기만 하던 남편은 이 한마디로 모든 싸움의 꼬리를 자르려 했다. 미안하다거나 잘못했다는 진심어린 사과가 듣고 싶은 내겐 턱없이 부족한 대답이었다. 그것에 더 약이 올라 격분하지만 벽에 대고 싸우는 게 차라리 나을 성 싶다. 바위보다 더 무거운 묵비권 앞에 나는 결국 백기를 들고 만다. 차 시트를 뒤로 젖히고 지그시 눈을 감은 남편이 석고대죄라도 하는가 싶더니 잠시 후, 드르렁 코고는 소리가 잔잔한 밤공기를 흔들었다. 제아무리 칼을 갈고 전의를 불태워도 적군이 자는 데는 정면 돌파를 무슨 수로 하겠는가. 머리만 닿으면 전쟁터에서도 잠을 잘 수 있는 느긋함에 기가 막혀 내가 쏜 헛총질만큼 실소가 터지고 만다.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 내거나 필요한 크기만큼 자르는 것은 칼이나 가위가 하는 본연의 임무다. 거친 것을 화급하게 다루다 보면 가위 날은 금세 터실터실해지고 틈은 어긋나기 십상이다. 가위는 칼과 달리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날을 벼리고 갈아서 다시 쓰기도 어렵다. 오래 부려먹은 노복老僕처럼 내치지도 못하고 고물상자로 내몰린 녹슨 가위도 새로 산 가위 수만큼 늘었다.
쓸모없이 잘려 나간 것들을 보면 나는 과연 세상에 필요한 존재였나를 돌이켜 본다. 화려한 겉치레를 쫓으며 엄살 부린 적이 많았고 속상해서 화를 낼 땐 가족들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믿는다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믿지 못해서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식구들을 챙겨주고 편히 쉬게 한 날보다 오히려 닦달하고 상처 낸 날이 더 많았다. 오랫동안 그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엄마고 못난 아내였다. 인내와 사랑으로 덮어주지 않았다면 나도 이미 가족의 눈 밖에 났을 지도 모를 일이다.
건강하고 깨끗한 것을 취하기 위해 연장을 쓰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통일과 조화를 위해 튀는 부분은 가차 없이 잘라내야 한다. 엄마, 아내, 며느리로서 지혜롭게 처신했는가를 돌이켜보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바쁘다는 구실로 아이들에겐 엄마의 부재가 길었고 남편의 지나간 잘못을 끄집어내어 내 잘못을 덮으려 했었다. 일을 핑계 삼아 부모님 찾아뵙기도 게을리 해서 이래저래 고집 세고 불경스런 며느리였다.
날을 갈고 벼리듯이 스스로를 독려해본다. 거칠고 고집스런 성미는 누그러뜨리고 모난 곳은 원만하게 다듬어라 한다. 깊고 넓은 통찰력으로 주변을 살피라 한다. 줏대 없이 휩쓸리지 말고 올곧으며,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키며 살라고 칼날이 내게 이른다.
수많은 직업 중에 어쩌다가 부부가 험한 칼과 가위로 일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칼은 약재나 호박 등을 썰어서 몸에 좋은 약을 만든다. 남편은 가위로 불필요하고 못생긴 부분을 다듬고 리본을 달아 아름다운 꽃다발을 만든다. 그로써 사람을 더 기쁘게 하거나 슬픔을 위로하는 마음의 약이 된다. 도구는 비록 험할지라도 사람에게 이롭게 쓰인다면 그 또한 얼마나 축복받은 직업인가. 쓰임새에 따라 그것으로도 세상을 아우를 수 있다.
칼과 가위, 비슷하면서 언뜻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다. 푸르렀던 신혼시절, 다른 집처럼 누가 먼저 칼자루를 쥐느냐 마느냐를 놓고 어리석은 기 싸움으로 기운을 뺀 적도 있었다.
'칼이 옳다, 가위가 옳다'와 같은 우매한 흑백논리는 이제 그만두련다. 칼과 가위도 애당초 자른다는 공통과제가 있듯 부부에게도 행복이라는 궁극의 목표가 있다.
칼이 못하는 일은 가위가 하고 가위로 불가능한 것은 칼로서 가능하리라. 부부가 합심하면 세상에 못자를 것이 어디 있으며 이루지 못할 것은 또 무언가.
장바구니에 가위 하나를 더 담는다. 건망증 탓에 옆에 놓아둔 가위도 못 찾는 남편을 위해 요긴한 것을 제때 내어주는 조력자이고 싶다. 남편이 나를 위해 마련해준 두툼한 숫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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