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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멍텅구리 빵집 / 박종희

멍텅구리 빵집 / 박종희

 

 

 

청주로 이사 오기 전, 30년을 넘게 살던 고향에 훈훈한 골목이 있었다. 학창시절부터 결혼 후에도 내가 즐겨 찾던 전통시장과 시장 모퉁이에 있던 먹자골목이다.

교통의 도시이고 역 근처라 그런지 유난히 발달한 먹자골목은 빵 한 개라도 덤을 얹어주는 아주머니들의 넉넉한 인심이 있어 '멍텅구리'라는 편안한 이름을 가진 빵집이 있었다. 가게 이름처럼 마음씨 좋은 주인은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비슷한 또래의 학생들에게 동생처럼 스스럼없이 대해주어 빵집엔 늘 학생들이 우글우글했다.

어려서부터 고생을 많이 했다는 사장님은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학생들에게 공짜 빵을 주기도 하고, 간혹 돈이 없는 남학생은 벽지에 이름을 적어놓고 외상 빵을 먹기도 했었다. 언제 가도 편안했던 그 곳은 각 학교의 대표들이 만나 회의를 하고, 단합대회를 하기도 했었다. 나도 친구를 만날 때면 으레 그 빵집으로 가곤 했다.

어느 날 빵집 사장님이 '멍텅구리 빵집'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달라고 한다는 말을 친구를 통해 들었다. 친구의 부탁을 받고 그 많은 이름 중에 하필이면 왜 '멍텅구리 빵집'이라고 이름 지었을까 싶었는데, 그 속에는 사장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많은 이익을 남기지 않고 좀 모자란듯 야박하지 않게 멍텅구리처럼 살고 싶다는 것이 빵집 사장님의 생각이었다. 의도대로 나는 멍텅구리 빵집에 대한 글을 써줬고 친구는 내가 쓴 글에 삽화를 그려 보기 좋게 액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얼마 뒤 빵집에 가보니 정말 내가 쓴 글이 가게 안 정중앙에 커다랗게 걸려 있었다. 덕분에 빵집에 가면 맛있는 도넛도 그냥 먹을 수 있었다.

그 후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해 딸아이를 데리고 빵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게 안을 들여다보니 10여 년이 지났는데 내가 쓴 시가 그대로 걸려 있었다. 오래되어 액자가 누렇게 빛바랬지만, 어찌나 반가운지 한참을 눈을 떼지 못하고 서 있었던 것 같다.

그 당시엔 가게를 임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시장의 좁은 골목에 천막을 치고, 긴 나무 의자를 한 개씩 놓고 장사해 먹자골목이라고 했다. 그중에서 멍텅구리 빵집은 제법 가게 모양새를 갖추고 있어 먹자골목에선 꽤 좋은 집으로 통했었다.

그 골목에는 여러 가지 음식이 있었다. 학생들이 부담없이 사 먹을 수 있는 것이 찐빵과 만두, 김치 부침개와 잡채말이였다. 생긴 것이 올망졸망 올챙이처럼 생겼다하여 이름 붙여진 올챙이묵도 별미였다. , 잘 익은 김치를 송송 썰어 놓어 칼칼한 국물을 부어주는 메밀묵과 만둣국은 얼마나 맛이 있었던가.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늘 거쳐 가던 곳이다 보니 골목을 들어서면 반갑게 맞아주는 낯익은 아주머니들도 꽤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골목은 직장인들로 넘쳐났다. 단조로운 구내식당을 벗어나 나도 가끔 그곳에서 점심을 먹었고, 결혼 후에도 친구를 만날 때면 학창시절이 그리워 자주 갔었다. 두 세 명이 같이 가면 적은 돈으로 다양하게 먹을 수 있어 좋았다. 서로 식성이 달라 메뉴에 없는 음식을 주문해도 한집안인 것처럼 여기저기서 가져다 차려 주는 인심 좋은 아주머니들이 있어 먹자골목은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자식이 사는 제천으로 이사 오셔서 잠깐 사셨던 시아버님도 상당히 좋아하셨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출출한 시간이 되면, 슬며시 자전거를 타고 가셔서 내가 좋아하는 찐만두를 한 봉지 사서 자전거 뒤에 싣고 오셨다. 당신은 별로 드시지 않고 며느리인 내게 많이 먹으라고 하시며, 늘 먹자골목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고향을 떠나온 지도 어느덧 15년이 지났다. 친정에 다니러가도 들리지 못해 아쉬웠는데, 얼마 전 그 유명했던 먹자골목이 없어졌다는 것을 친구한테 들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대형화되는 슈퍼마켓과 할인점의 등장으로 재래시장이 사라지고, 자연스럽게 먹자골목도 철거되었다고 한다.

친정을 생각하면 그리운 골목이 함께 떠오른다. 배고픈 학생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던 멍텅구리 빵집 사장님과 기름때 묻은 앞치마를 두르고 환하게 웃으며 맞이하던 정겨운 아주머니들은 모두 어디로 가셨을까. 세월은 혼자 가지 못하고 어쩌자고 자꾸 그리운 것들까지 데리고 가는 것인지, 갈수록 잊혀가는 옛것들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