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 김상태
인류는 언제부터 길을 만들기 시작했을까. 동물들도 다니는 길이 있는 것을 보면 인류도 진화하기 훨씬 이전부터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하잘 것 없는 미생물도 가는 길이 있는 것을 보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생물은 모두 길을 만들 수 있고, 길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길이 만들어진 내력, 길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동물을 알기 위해서는 생태학을 전공한 학자에게 물어 보아야 할 것 같다. 길은 동물의 생존과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미의 젖을 찾아 입을내두르는 것도 일종의 길 찾기 행위로 본다면 생존의 본능과 길을 찾는 본능은 거의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같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본능적 행위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어떤 목표를 가지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해서 만들어낸 길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된다. 동물이나 인간이나 먹이를 획득하기 위해서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물은 자연 그대로를 저들이 다니는 길로 이용했지만 인간은 자연에다 인공의 힘을 가하여 인간이 다니는 길로 만든 것이다.
물론 동물들도 자연을 약간 변형시켜 길을 만들 수도 있고, 인간도 거의 자연 그대로를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정도의 차이는 자연과 문명의 차이만큼 달라지기 시작했다. 한번 갔던 길을 익혀 두었다가 다시 가게 되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처음으로 갔던 길을 다시 더 가지 않게 되면 그것도 길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좀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최초에는 먹이를 위해서 길을 만들었지만, 다음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만들기 시작했을 것이다. 인류학자들은 날것을 먹다가 익혀서 먹기 시작한 것이 인류 문명의 시작이라고 하지만, 사람을 만나기 위하여 길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문화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문화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서 시작된 것이다. 때로는 협동하기 위하여, 때로는 싸우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만났던 것이다.
현대는 길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길이 얼마만큼 잘 뚫려 있느냐에 따라 그 문명의 깊이와 넓이를 짐작 할 수 있다. 마을길에서 신작로 길로, 다시 고속도로로 뚫리면서 문화의 패턴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철로는 철로대로, 선박은 선박대로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길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최근세에 들어와서이다. 지금 우리가 편하게 쓰고 있는 전화나 인터넷 또한 길의 일종이다.
길은 단지 물리적인 세계에서만 사용된 것은 아니다. 길의 의미를 정신세계에 확장해서 사용한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다. 불타, 공자, 예수 등 인류의 성인 반열에 드는 분들은 모두 진리를 길이 비유하여 가르쳤다. 정신적으로 바른 길이 과연 무엇인가를 물으면서 가르치지 않았는가.
지상의 길이 아무리 복잡다단해도 그 길은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 어디에 도달하는지는 결국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신의 길은 아무리 자세하게 설파해도 따라가기가 지난하다. 아니, 가르치고 있는 그분 자체도 과연 분명하게 알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흔히 우리는 도를 닦는다고 말한다. 이 말은 인간이면 가야 할 바른 길을 닦는다는 말이다. 길과 도는 같은 말이다. 그래서 길 도道라고 길게 소리 내어 읽지 않는가. 불교나 도교에서 잘 쓰는 말이긴 하지만, 기독교에서도 많이 쓰고 있다. 수도원修道院이란 결국 도를 닦는 곳이 아닌가.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들의 정신 속에는 분명히 가야 할 길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육로, 해로, 항로가 미로迷路같이 얽혀 있다 하더라도 이 지구상의 길이야 찾으려면 찾지 못할 길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정신의 길은 찾기도 어렵지만 도정道程도 어렵다. 누구도 옳다고 장담할 수 없는 길이다. 아니, 자기 길이 옳다고 주장해서 오히려 헷갈린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말은 사유思惟를 거듭한 끝에 가야 할 길의 출발점을 찾았다는 말 아닌가. 다른 어떤 사람이 찾아낸 길도 믿을 수 없고, 그의 감각과 지각으로 찾아낸 길도 믿을 수 없고, 그 자신의 존재까지도 믿을 수 없다고 한다면, 대체 무엇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사유하고 있을 때의 자신만은 적어도 존재할 것이 아닌가, 하는 데서 데카르트 길의 출발점이 있다.
생명선상에서 보면 우리 모드는 같은 길을 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예수는 천국에 이르는 길과 지옥에 이르는 길이 전혀 다르다고 말한다.
천국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즐겁고 행복한 나날이 계속되는 곳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 대신 지옥으로 가는 길은 괴롭고 고통스러운 곳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같은 삶을 살고 있지만 길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내가 곧 길이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고 요한복음은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곳은 말할 필요도 없이 천국이다. 그러니까 그를 믿지 않는 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했으니, 부득불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 그가 가르치는 길은 너무나 명확하다.
이에 비해 불타佛陀는 조금 망설이는 대답을 한다. 팔만대장경에 나와 있는 불타와 제자간의 대화는 이렇다.
"불타여! 길을 가는 나그네가 목적지에 이르고 안 이르고 상관없이 저는 다만 길을 가리켜 주면 되지 않습니까?"
"못가라아나여 나도 역시 마찬가지다. 분명히 열반涅槃은 있고, 열반으로 가는 길도 있고, 또 그 길을 교섭하는 나도 있건만 사람들 가운데는 바로 열반에 이르는 이도 있고, 못 이르는 이도 있다. 그것은 나로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나는 다만 길을 가리킬 뿐이다.
공자의 말은 좀 더 인간적이다.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으리라(朝聞道 夕死可矣)" 사후死後의 세계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대답한 그로서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수와 불타는 세상을 사는 도를 이미 깨달았다는 말이지만 공자는 깨달아가는 중이라는 뜻이다.
이들 모두 우리가 어떤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길'을 정신세계에 대해서 은유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들이 가리키는 목적지는 물론 다르다. 따라서 길도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리키는 '길'의 다름으로 인해서 각기 다른 종교가 된 것이다.
같은 길, 같은 목적지를 가리키면서 도정의 다름으로 인해서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처럼 싸우는 종교도 있다. 우선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그렇지 아니한가. 아니, 같은 기독교 안에서, 같은 이슬람교 안에서도 길이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서로 죽이고 죽는 일을 얼마나 오랫동안 해 왔는가.
자기들이 가는 '길'만이 바르고, 다른 종교가 가는 길은 틀렸다고. 최근에 와서 다소 화합하는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노자老子는 그의 도덕경 첫머리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이름으로 불리는 것, 그것은 이미 그것이 아니다(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가리키는 '길'자체를 부인해 버린 것이다. '길'이라고 떠들어대는 것은 모두 길이 아니라는 뜻이다. 가리켜서는 길을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스스로 깨달아야 된다는 뜻이다. 그러면서도 우주 만물에 대해서 깨닫도록 설파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또한 어떤 '길'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수풀을 헤치며 인간이 만들던 그 길, 겨우 얼마를 못 가 지쳐서 주저앉던 그 길, 이제는 세계 곳곳을 누비며 길을 만들고 있다. 자동차로, 기차로, 비행기로, 사람의 걸음으로 가던 그때보다는 눈이 휘둥그레지도록 빨라지지 않았는가.
이제는 지구 안에서만이 아니고, 달에까지 가는 길을 만들고 있다. 아니, 다른 행성들에까지 가는 길을 자꾸 만들고 있는 모양이다. 인터넷으로, 휴대폰으로 지구촌 어디에도 닿을 수 있는 길을 만들고 있다.
길의 확장은 한량없이 늘어나고 정교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혼으로 통하는 길은 아직도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이 지상의 삶과는 다른 영혼의 세계가 과연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온갖 길이 다 뚫려 있다. 너무 많아 서로 애매하고 모호한 길이 수없이 교차하고 있지만 이 두 길만은 처음부터 명확하게 나누어져 있다. 하기야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도 있어 그 해답을 유보해 둔 사람들도 많지만, 나도 그중의 하나다. 아무리 유보해 둔 상태라고 해도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을 부인할 수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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