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공사장 사람들 / 고병옥

공사장 사람들 / 고병옥  

 

 

 

공사가 시작된 것은 9월 초였다. 내가 살고 있는 사택 앞에 새 건물을 짓는다. 담도 가리도 없으니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다 볼 수 있다.

파란 하늘 아래 산뜻한 건물이 그려진 조감도와 빨간색의 위험 표지판 그리고 출입 금지구역이라는 푯말이 세워지고 곧바로 포클레인이 들어왔다. 검은 땅에 그어놓으 백회선을 따라 흙을 파내어 가장자리에 쌓는다. 세상살이에 시달린 지표의 검은 흙을 걷어내니 황토색깔의 고운 흙이 나온다. 사람도 가슴속에 담고 사는 근심 걱정을 흙 걷어내듯 쉽게 걷어낼 수 있다면 인생을 고해라 했겠는가. 각박한 삶을 떨쳐 내려는 듯 운전석의 젊은 기사는 휴식도 없이 부지런히 손을 놀린다. 날이 어두워지자 불을 밝히고 작업을 계속한다. 조용한 시골마을에 포클레인 소리만이 밤공기를 타고 널리 퍼진다. 그렇게 여러 날이 지나갔다.

거푸집을 만드는 날이다. 짙은 안개 때문에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 십여 명의 인부들이 봉고차를 타고 백여 리 새벽길을 달려왔다. 세상이 곤히 잠들어 있을 한밤중에 일어나 발소리 죽여 가며 집을 나선 가장들이다. 도착하자마자 풀섶 이슬을 피해 언덕 아래 난전에서 작업복으로 갈아입는다. 일한 세월을 대변이라도 하듯 빛바랜 모자를 머리에 쓰고 갖가지 연장이 든 주머니를 허리에 찼다. 아무리 무거운 연장주머니라 한들 그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에 비할까.

바닥부터 얼기설기 엮어 놓은 철근기둥을 따라 망치를 힘껏 두드려 거푸집을 짓는다. 합판을 한 장 한 장 붙여 나가자 제법 건물의 윤곽이 드러난다. 거푸집, 헐렁한 껍데기 같은 것, 종당에는 떼어버릴 것.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못질을 할 수는 없다. 선과 각을 맞추어 한 장 한 장 정성스레 거푸집을 쌓아 올린다. 거푸집을 잘 만들어야 좋은 건물이 된다는데 내 인생에 거푸집은 잘 되어가고 있는가. 양심의 조각을 비뚤게 붙인다든가. 인연의 못을 잘못 박았다든가, 끈기와 노력만 있으면 될 일을 쉽게 포기하거나 게으름을 피우지는 않았는지. 공사장 여기저기에서 망치소리가 요란하다.

한쪽에서는 아주머니들의 철근을 세운다. 가로 세로 엮은 철근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철사로 고정시키는 일이다. 챙이 넓은 모자에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난간에 붙어서 철사를 둘러 묶는 솜씨가 날렵하다. 세상의 인연을 붙들어 매듯 정성을 들인다. 인연은 운명이라 말하지만 어찌 내 노력 없이 좋은 인연을 바랄 수 있을까. 향을 쌌던 종이에서는 향기가 나고 생선을 꿰었던 새끼에서는 비린내가 나는 것과 같이 사람은 원래 깨끗한 것이지만 인연에 따라 죄와 복을 부르는 것이라는 부처님 말씀이 생각난다.

새참 시간이 되어 배추를 씻으로 온 아주머니와 수돗가에서 만났다. 삼십대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건축공사장에서 일하며 4남매를 고등학교까지 가르쳐 시집 장가보냈다는 아주머니는 나이보다 늙어 보였다. 그래도 이 나이에 일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한다. 가장의 짐을 짊어진 엄마가 눈물인들 보일 수 있었을까. 떠나간 남편을 목 놓아 불러 볼 여유도 없었으리라. 굳은 살이 박히고 살갗이 갈라진 손이 살아온 세월을 짐작케 한다. 휴식시간 15, 새벽부터 시작한 일은 새참이 되어서야 허리를 펴고 서로 이야기도 나눈다.

12, 공사장 사람들의 점심시간이다. 점심 식사가 끝나자 건축용 스티로폼을 한 장씩 들고 적당한 곳을 찾아 자리를 잡는다. 감나무나 은행나무 밑, 어떤 분은 하늘이 통째로 보이는 빈터의 한쪽에 누워 눈을 감는다. 어깨에 짊어졌던 삶의 무게들을 잠시 내려놓고 쉬고 있다. 구름이 해를 가려주니 바람도 대밭에서 나와 살랑거린다. 몸이 아무리 피곤해도 마음이 편치 못하면 잠을 이룰 수가 없지 않던가. 그래서일까. 유독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젊은이가 있다. 그를 괴롭히는 것은 한 그릇의 밥일까. 붙잡지 못한 꿈일까.

거푸집이 완성된 다음 날 레미콘이 들어왔다. 어제까지 왔던 사람들은 없고 새로운 얼굴들이다. 물과 모래, 시멘트가 잘 배합된 재료는 긴 관을 통해 거푸집 속으로 쏟아진다. 지정된 장소에 적당량의 시멘트가 부어지면 장화를 신은 아저씨들이 무릎까지 빠지는 시멘트 웅덩이에서 부족한 곳도 남은 곳도 없이 평평하게 고른다.

레미콘 차가 다녀간 뒤로 십여 일 넘게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은행나무에는 노란 가을이 살포시 다가왔고 텃밭의 무 배추는 날로 청청해갔다. 공사장의 휴식은 하는 일 없이 쉬는 줄 알았더니 시멘트가 양생중이란다. 아무도 접근 못하게 노란 비닐 끈으로 경계를 쳐놓고 그 안에서 숨소리도 내지 않고 앓고 있다. 튼튼한 건물이 되기 위해 스스로 단단히 굳어가고 있다. 운동선수도, 공부를 하는 사람도 자기와의 싸움이라 했다. 열쇠는 내 안에 있다는 말 아닌가.

날씨가 쌀쌀해졌다. 건물 모양이 갖추어지자 내부 공사를 하기 위해 트럭에 짐을 가득 싣고 젊은 부부가 왔다. 두꺼운 옷으로 중무장하고 밤늦게까지 일을 한다. 저녁밥은 먹고 하는지, 한참 있다 내다보니 아직도 작업 중이다. 집에 있는 어린 아이들은 어쩌고 이 시각까지 일을 할까. 걱정에 잠은 달아나버렸다. 어스름 밤공기가 중무장하듯이 건물을 에워싸고 있더니 자정이 가까워져서야 불이 꺼졌다.

새벽으로 찬 서리가 내리고 기온이 뚝 떨어지자 빈 드럼통이 야외용 간이난로가 되어 공사장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부터 난로로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땔감을 넣을 수 있고 공기통만 있으면 훌륭한 난로가 된다. 사람들은 도착 하자마자 불을 지핀다. 공사장 여기저기 굴러다닌 땔감이 불길 속으로 들어간다. 쓸모없는 나무토막이 따뜻한 기운과 춤추는 불길로 환생하여 추위에 언 몸을 녹여주고 한 줌 재로 스러진다. 아름답지 않은가.

오늘도 주차장에는 공사장 사람들이 타고 온 차가 파수꾼인 양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