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원색 / 유홍준
유난히도 봄이 일찍 찾아온 강진 땅에 모든 봄꽃이 피어 있었다. 산그늘마다 연분홍 진달래가 햇살을 받으며 밝은 광채를 발하고 있었고, 길가엔 개나리가 아직도 노란 꽃을 머금은 채 연둣빛 새순을 피우고 있었다.
무위사 극락보전 뒤 언덕에는 해묵은 동백나무에 선홍빛 동백꽃이 윤기 나는 진초록 잎 사이로 점점이 붉은 홍채를 내 뿜고, 목이 부러지듯 잔인하게 떨어진 꽃송이들은 풀밭에 누워 피를 토하고 있다. 그리고 강진읍 묵은동네 토담위로는 키 큰 살구나무에서 하얀 꽃잎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것이 남도의 봄빛이었다.
피고지고 저 꽃잎의 화사한 빛깔은 어쩌다 때가 되면 한번쯤 입어보는 남도의 연회복이라면, 남도의 땅의 평상복은 시뻘건 황토에 일렁이는 보리밭의 초록물결 그리고 간간이 악센트를 가하듯 심겨 있는 노란 유채꽃, 장다리꽃이다.
한반도에서 일조량이 가장 풍부하다는 강진의 하늘빛은 언제나 맑다. 강진만 구강포의 푸름보다도 더 진한 하늘빛이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청색의 원색이다. 색상 표에서 제시하는바 사이언(c)그대로다. 솔밭과 동백나무숲이 어우러지며 보리밭 물결이 자아내는 그 빛깔은 노란색과 청색이 합쳐진 초록의 원색이다. 유채꽃, 장다리꽃, 개나리꽃은 노랑(y)의 원색이며 선홍빛 동백꽃잎은 마젠타(m)이다. 그 파랑, 그 초록, 그 노랑, 그 빨강의 원색을 구사하며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남도의 봄 이외에 아무도 없다. 그 원색을 변주하여 흑갈색 황토와 연분홍 진달래, 누런 바다갈대밭을 그려낸 화가도 남도의 봄 이외엔 아무도 없다.
서양 사람들이 그들의 자연 빛에 맞추어 만든 먼셀 색상 표에 눈이 익어버린 그 수치에 맞추어 제조된 물감과 잉크로 그림 그리는 일, 인쇄하는 일, 그렇게 제작된 제품에 익숙한 우리의 눈에 저 남도의 봄날이 그려 보인 원색의 향연은 차라리 이국적이고, 저 먼 옛날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그림에서나 본 조선왕조의 원색으로 느껴진다. 하물며 연지 빛, 쪽빛의 청순한 색감을 여기서 더 논해 무엇 할 것이냐.
나는 우리시대의 화가들에게 단호히 말한다. 남도의 봄빛을 보지 못한 자는 감히 색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 ‘되다란’ 기름기의 번쩍이는 물감을 아무런 정서적 거부감 없이 사용하면서 함부로 민족적 서정이니 향토색이니 논하지 말라.
그리고 모든 화공공학자, 모든 화공제조업자, 모든 화장품회사, 모든 염색업자, 모든 물감공장의 관계자들에게 민족의 이름으로 부탁드린다. 그 뛰어난 기술, 그 좋은 시설의 100분의 1이라도 잃어버린 조선의 원색을 찾아내는데 사용해달라고, 우리에게 무한한 평온과 행복한 환희의 감정으로 다가오는 향토의 원색을 제조해 달라고.
남도의 봄, 그것은 우리가 영원히 간직해야 할 자연의 원색이고 우리의 원색인 것이다. 나는 그날 그 원색의 물결 속을 거닐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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