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켜지다 / 강여울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진다.
브레이크를 밟고 서서히 차를 멈춘다. 반대편 차선으로 제 몸도 삼킬 듯 강렬한 불빛을 달고 자동차들 무섭게 달린다. 어둠이 진저리치며 부지런히 길을 연다. 어둠의 배를 가르고 질주하는 눈부신 불빛들의 행렬 도시는 밤에도 힘차다.
사랑에 처음 눈이 맞은 젊은 연인도 저렇게 힘차고 용감해지지. 가슴에 환하게 불이 켜져서 세상이 온통 자신들을 위해 존재하고 길을 여는 것처럼 보이지. 내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도 그렇게 가슴에 환하게 불이 켜졌었나 봐. 폭주나 거친 말까지도 남자다운 매력으로 보였어. 직업이 없는 것도 건강한 젊음이 있으니 산인들 옮기지 못할까 문제 될 게 없었지. 그가 가진 문제들은 내가 들어가 채워야할 빈틈만 같아 오히려 기뻤으니까.
신호등에 노란 불이 켜진다.
사각지대에 들어선 차는 맹렬히 달리고 뒤이어 오던 차들 불빛을 줄이고 줄줄이 멈추어 선다. 아무리 곧은길도 가끔은 쉬었다 가야지. 사람도 지나고 개도 지나고, 전방과 좌우에서 오는 차들에게도 길을 열어줘야지. 저마다 갈 길이 따로 있는 법 나만 먼저 가겠다고 우기면 사고가 생기지. 잠깐 타인에게 길을 열어 주고 그들이 길 가는 모습에서 나를 반성해 보는 거야.
맹렬하고 오랜 질주 다음에는 반드시 잠시 멈추는 휴식이 필요한 거야. 차의 열을 식히듯 사랑도 가끔은 한 발 물러나 기다림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지. 그래야 더 깊이 서로를 가슴에 담을 수 있지. 어느 날부터 사랑은 서로의 빈틈을 메우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품는 거라는 걸 알았지. 있는 그대로 품는 것이 쉽지는 않아. 모양도 색깔도 다른 또 한 가슴을 온전히 안는 것은 많은 아픔과 상처를 견디는 일이지. 파랑새를 위해 하늘 가슴이 되겠다는 시인의 노래처럼 나도 날마다 가슴을 키우려 노력했어. 언제나 그가 들어와 쉴 수 있게 편안한 자리를 펴고, 정원을 가꾸듯 아이들의 웃음도 키웠지.
초록색 불이 켜진다.
헤드라이트를 켜 어두운 길 헤쳐가야지. 잠시 쉬었으니 천천히 출발을 하고 속도가 오르면 힘껏 달려가야지. 차나 사람이나 길의 흐름을 잘 타야해. 앞서가는 불빛들의 속도에 맞춰 질주를 해야지. 아무리 대로를 질주하는 중이라도 모퉁이를 만나면 속도를 줄이고 조심해야해. 튀어나오는 불빛이 있는지도 잘 살펴야 하고. 목적지가 어딘지도 잊으면 안 돼. 아무리 질주가 신명나고 즐거워도 내 목적지로 가는 길이 아니면 비상깜박이를 켜고 갓길로 비켜나는 거야. 너무 갔으면 유턴을 해서 돌아오고, 일방통행 좁은 샛길로 가야한다면 그 길로 들어서야지.
샛길이라고, 모퉁이라고 나쁜 것만은 아니야. 그 샛길이 지나고 보면 지름길이기도 하고, 위험한 모퉁이도 돌고 보면 고속도로와 이어지는 길이기도 해. 씩씩하게 질주하듯 이삼십 대가 가고 사십 대로 접어들며 내 가슴이 새장처럼 좁아졌다고 답답해했지. 그가 내 인생을 가로막는 바리게이트라고 가슴을 치다가 보았어. 결국 시간은 나를 가르치는 불빛으로 내 손을 이끌고 있었던 거야. 고통들이 고통을 이기게 하는 힘이 되었던 거지. 그도 나도 서로에게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던 거야. 그믐에서 다시 만월이 되는 달처럼, 일식과 월식처럼 부부는 그렇게 서로의 빛이 되기도 하고 그늘이 되기도 하면서 공존하는 거였어.
내 차의 출몰에 캄캄한 골목이 화들짝 놀라는 모습도 정답지. 집 앞에선 모든 게 환해 보이지. 자동차의 시동을 끄고, 내 스스로 불빛이 되어 대문을 열면 그와 아이들의 반가운 웃음이 켜지고, 현관을 들어서면 나도 환하게 켜지지. 나는 가족이라는 등불 속에서 온전한 빛이야. 가족의 인생길에서 빨강, 노랑, 초록으로 때맞춰 불을 바꿔 켤 줄 아는 신호등. 나의 이름은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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