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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기도 / 김정순

기도 / 김정순





  기도는 간절했다.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밀려 올라온 기도는 보이지 않는 절대자를 향하고 있었다. 죽음의 문 앞에 선 연약한 어미의 절박한 기구. “하느님 10년만 더 살게 해 주십시오. 내게는 그 10년이라는 세월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기독교 교인도 아닌 내가 하느님을 부르며 10년을 살게 해 달라고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 데에는 남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심장은 결혼 십년쯤부터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갑자기 가슴이 뛰고 숨이 가빠오면 병원으로 달려가 응급치료를 받아야했다. 정밀검사를 해보았으나 병의 원인은 알 수 없었다. 다만 “특발성심장증상” 이라고만 할 뿐 치료약도 없었다. 증세가 나타나면 어느 때든지 가까운 종합병원으로 속히 가라는 진단뿐이었다. 삶이 고단하여 주체할 수 없는 스트레스가 겹쳐오면 왼쪽 등이 뻐근해 오다가 심장은 어김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발작하는 심장의 박동으로 오랜 세월동안 병원을 드나들었다.
그날도 심장 박동이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했다. 덜컥! 하는 느낌과 함께 내 심장의 박동은 순식간에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보통 때의 심장박동은 1분에 80회 전후지만 문제를 일으킨 내 심장의 박동은 200회를 넘어 230회 250회로 온몸이 덜덜 떨리듯이 요동쳤다. 심장의 박동이 빨라질수록 심장은 힘을 잃어가고, 온몸의 힘이 빠지며 혈압이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숨은 목구멍까지 차올라 헐떡였다. 계단을 내려올 힘조차 없어 비틀거렸다. 언제나처럼 종합병원의 응급실로 달려가야만 살 수 있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급기야 나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내 나이 마흔넷, 첫애가 대학에 입학한 지 만 1년이 되기 전이었다. 나는 병실의 침대위에 누워있었다. 양손과 양 발목, 가슴에는 심전도기와 연결된 기구들이 달려 있고, 콧구멍으로 산소가 공급되었다. 왼팔 정맥에는 수액의 공급과 약물을 투여하기 위하여 링거 병에 연결된 호스가 꽂혀있었다. 강심제를 투여하고 각종 치료제를 투여하지만, 내 몸과 연결된 계기판의 숫자는 좀처럼 제자리를 찾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까지의 예로 봐서는 치료의 효과도 나타나고 심장도 정상 박동을 해야 할 때가 되었는데도 차도가 없었다. 갑자기 물줄기 같은 것이 등줄기를 타고 머리위로 솟구치는 느낌을 받았다. 간호사가 다급하게 의사를 찾았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의사는 보호자를 찾았다. 이웃침대 환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 침대를 향하여 모아졌다. 젊은 나이에 딱하다 는 듯 그들의 눈빛에 동정과 근심이 어렸다. 내가 죽음에 임박했음을 주위의 분위기가 말해 주고 있었다. 쉽게 치료되리라 믿었던 남편의 얼굴에도 당황해 하는 빛이 역력했다. 근심어린 눈으로 애간장이 녹아나는 어머니의 모습은 더욱 애처로웠다. 늙고 야윈 어머니의 마음속에도 딸을 위한 간절한 기도는 이어지고 있었으리라.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울듯이 바라보던 어머니는 온몸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황급히 일반 병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내 침대 곁에는 더 많은 의료 기기들이 준비되고 심장의 박동과 혈압과 호흡들이 체크되고 있었다. 천정에 매달린 희미한 형광등 불빛은 꺼져가는 내 생명처럼 가물가물 흐릿했다. 계기판의 심장박동 숫자는 내려 갈 줄을 모르는데 내려가지 말아야하는 혈압은 40에서 50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죽는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살고 싶다고 살아지는 것이 아니고 죽고 싶다고 죽을 수 있는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렇지만 지금 내가 죽는다면 내 아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중에서도 딸이 먼저 떠올랐다. 딸에게는 어머니가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를 내 어머니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는 일이다. 앞으로 최소한 10년은 내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예과 1년생이니까, 남은 대학생활 5년, 인턴 1년 전공의 4년, 낙제하지 않고 올라가도 10년이라는 세월이 엄마의 도움이 필요한 기간이다. 10년만 돌보아준다면 전문의가 되어 홀로 설 수 있으리라. 욕심 부리지 말고 일반학과에 보냈더라면, 죽음의 문턱에서 홀가분하지 않았을까. 내가 부린 욕심이 후회가 되었다.
가정주부로 살아오면서 억울했었다. 가사일이란, 능력 없는 여자가 하는 일이라는 취급은 너무나 부당했다. 내 딸은 어떻게 하든지 전문직업인이 되어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바랐다. 싫다는 의과대학을 닦달을 해서 보낸 내가 아니던가? 내게 죽음이라는 것이 이렇게 빨리 찾아 올 줄 알았더라면 힘든 길로 아이를 내몰지 않았을 것이다. 자식에게 어머니란 무엇보다도 중요한 존재다. 내가 아프면 새벽이라도 달려와서 보살피고 진정으로 걱정하는 이는 어머니였다. 가슴이 무너지는 아픔으로 자식을 근심하는 이가 어머니 말고 또 있을까? 불혹의 나이에도 내게는 어느 누구보다 필요한 게 어머니였었다. 내가 없다면 내 딸은 어렵고도 고단한 길을 어떻게 헤쳐 갈 것인가? 가슴속으로 눈물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기도하고 있었다. “10년만 더 살게 해 주세요. 더 이상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어미의 간절하고 진실한 기도는 하늘에 닿았나 보다. 나는 일주일 만에 죽음의 문 앞에서 한 발짝 한 발짝 생의 길로 걸어 나왔다. 하느님께 간구한 10년을 자식을 위해 아낌없이 주고 살리라 다짐했었다. 나라는 존재는 마흔넷의 나이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그 다음의 생은 자식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대신하려했다. 그 후로도 병원을 방문 여닫듯이 드나들며 가슴 졸였다.
1998년 의학의 발달로 내 심장의 병명과 원인이 밝혀졌다. 인체는 신비롭기만 하다.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에 내 심장은 살아남기 위해 비상구처럼 새로운 혈관을 만든 것이다. 병명의 진단과 함께 새로운 기술의 치료를 받았다. 대퇴동맥을 통하여 기구를 삽입하여 심장에 새로 생긴 문제의 혈관을 레이저를 쏘아 끊어 버리는 치료였다. 근 20여년을 끌어오던 심장병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10년만 살게 해 주십사고 기도했던 내 기도는 10년을 넘기고 덤으로 8년을 더 살고 있다. 그토록 두고 떠나기 아쉬웠던 딸아이를 결혼까지 시켰다. 귀여운 손자손녀까지 거느린 다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딸을 바라보며 지난날을 회상해 본다. 이 순간의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해준 보이지 않으신 그분께 오늘도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