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세레나데 / 이상예
계절이 바뀌어 강마을에도 가을이 깊었다. 나는 하늘이 높고 맑은 청색을 띄며 화선지와 자잘한 그림도구를 챙겨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금호강으로 간다. 금호강 둑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사람들로 웅성거리지만 선득한 날씨 탓인지 간간히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나 팔을 씩씩 흔들며 지나는 몇 몇 사람들 뿐 사위는 조용하다. 내가 서 있는 공항교에서 강 하류로 비껴가다 보면 갈색 억새밭이 펼쳐진다. 나는 그곳에서 올망졸망 그림도구를 내려놓고 강을 그리며 고향을 떠 올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은 자연을 모방하는 행위’라던가. 그것은 신의 지혜를 훔치고 대상을 사진 찍듯이 그대로 옮긴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저 주과도 객관도 없이 있는 그 자체의 의미를 재확인하여 배운다는 뜻은 아닐까. 지금 내가 누리고 사는 문명의 이기들이 자연을 모방해서 얻어낸 것이라면 한 자루의 붓을 들고 저물어 가는 계절에 강으로 나가 고향을 그리는 것도 무의미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늘 시멘트 냄새가 진동하는 도심에 살고 있지만 때로는 길가에 나무 한 그루, 하늘에 무심코 흘러가는 구름을 보게 된다. 분명이 어제 보았던 것들이지만 오늘 그것이 전혀 새롭게 보일 때가 많다. 본다는 것은 언제나 완벽하지만은 않는 모양이다. 잡동사니들로 채워진 내 마음을, 내 안에 있는 나를 흔들어 깨워본다. 그랬더니 한 송이 노란 국화꽃이 촛불로 보이는 듯도 하고 노을 진 하늘에서 침묵하는 초월자의 숨결을 느끼는 듯도 하다.
구도를 잡는다. 제방 주변으로 눈길을 준다. 가지 많은 수양버들은 팔랑거리는 잎들을 하나 둘 바람에 실어 보내느라 바쁘다. 꽃, 나비, 물오리 강물 위로 혹은 강물 밑으로 온갖 생명체들이 가을 보내기에 분주하다. 목덜미에 유난히도 푸른빛이 도드라진 비둘기는 소품으로 내려 앉아 간식을 먹는다. 두 마리 , 세 마리 그 수는 점점 늘어 어느새 대 가족을 이루었다. 비둘기에서 평화를 보며 강물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내 고향의 강물은 언제나 맑고 밝은 청색을 띄지만 이곳 강물도 그와 닮아 푸르다. 고불고불하고 길게 이어져 흐르는 강줄기는 막연하나마 어머니 탯줄 같아 그렸다.
물의 흐름 따라 가본다. 늘 바쁘게 달리는 내 삶과는 달리 그저 천천히 걸어서 간다. 느리게만 가는 저 물을 따라 느긋함이 내 중심에 서서 나를 붙든다면 쫓기만 하는 내 마음도 십리도 더 못가고 고향으로 돌아갈 텐데. 가서 하루 이틀 쯤이라도 낮에는 물고기들을 쫓고 밤이면 새소리를 들으면서 잠든 내 모습을 한껏 그렸으면, 어디선가 불어오는 강바람 냄새는 향수 같아 솔솔 그린다.
“퍼덕”물 문 주위에서 배가 앞산만한 물고기가 은빛 비늘을 번뜩이며 수면위로 튀어 오른다. 연어가 고향을 찾은 걸까. 연어의 고향은 원래 민물이다. 랑에서 깨어나고 어느 정도 자란 뒤 흐르는 물살을 따라 바다로 간다. 그곳에서 짠물을 마시며 뼈가 자라고 살이 자라면서 그렇게 한 세월 살아간다. 때로는 고래를 마나고 태풍도 만나면서 계절이 무시로 왔다 가기를 몇 해, 가을이 되고 알을 낳을 때가 되면 모천을 향해 튀어 오른다. 오르다가 주둥이가 깨어지고 피가 줄줄 흐르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연어는 강에 오르기를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연어가 목숨을 걸고 오르고자 했던 그 곳이 바로 연어의 고향, 모천이기 때문이리라.
나도 강이 있는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내 고향 강은 산에서 시작하여 계곡을 돌고 돌아 낮은 데로 흘렀다. 사랑방 문을 열고 눈만 주면 언제나 강이 눈앞으로 펼쳐졌다. 학교에 갈 때나 시장가신 엄마를 마중 나갈 때에도 강이 먼저 나를 반겼다. 엄마에게 꾸중을 듣고 쪼르르 강으로 달려가 맑고 깊은 강물을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강물이 짙어지고 내가 작은 숙녀가 되어 갈 무렵, 연어가 어느 정도 자란 뒤 바다로 나가듯 나도 타향으로 나왔다. 타향에서 사람을 잃거나 그리워지면 홀연히 강이 있는 그곳 고향으로 가 강둑을 걷고 걸었다. 거기서 내 부모님을 만나고 형제를 만나고 코흘리개를 만났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대구에 정착한 지도 수십 년이 흘렀다. 긴 세월 이곳에서 살아도 여기가 내 정신적 지주, 고향이라는 생각은 아직 들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 가슴 깊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질주하는 것만으로 만족을 느낄 수 없을 때, 세상살이로 지치고 힘 들 때 강이 있는 고향으로 가 그 넉넉한 품속에 안겨 보는 것도 좋으리라.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이 있다면 고향의 색일 것이요 영원히 바래지 않는 그림이 있다면 그 또한 고향의 풍경일 것이다.
그림을 그리자면 붓을 잘 다루어 고향을 그리되 고향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되고, 고향을 읽을 수 있으면 되고, 또한 고향 풍경을 볼 수 있으면 되지 않겠는가. 아직 못다 그린 얼굴들이 서쪽 하늘에 걸렸는데 이곳 금호강 하늘이 회색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선지에 거의 청색으로 채색된 그림을 액틀에 끼웠더니 그림이 한결 돋보인다. 사람이나 그림이나 제자리에 들면 근사해 보이는가 보다. 금호강 다리 위로 차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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