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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레일 / 김희자

레일 / 김희자

 

 

 

기차가 연착이라 했다. 플랫폼으로 들어서야 할 시간이 지났건만 길게 누운 선로에는 밤바람만 휘적댄다.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했던가. 긴 기다림처럼 어둠 속에 두 개의 선이 늘어져 있다. 기차가 오고 가는 레일이다. 연을 맺고 나란히 가는 부부처럼 쌍을 이룬 몇 개의 레일이 누워 있다. 긴 선로 너머로 인생의 미로처럼 얽힌 레일 몇 개가 희미하게 들어온다. 주택가와 경계를 이룬 담벼락 아래는 마른 해바라기가 고개를 숙인 채 물끄러미 서 있고 철길을 밝히는 가로등이 명상에 잠긴 듯 말이 없다.

커피 한 잔을 빼들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밤하늘은 별들의 벌판이다. 대기가 맑아 흘러가는 구름 사이로 별들이 마구 쏟아질 것만 같다. 자연을 향해 마음을 열었더니 밤하늘이 유난히 가깝다. 초가을의 밤하늘은 시원하다기보다 새침한 맛이 난다. 바람만 서성이던 또 다른 선로 위로 기적 소리를 요란히 지르며 기차가 들어선다. 철커덕 하고 기차가 정지하자 열린 문틈으로 개미의 행렬처럼 사람들이 내려서고 올라탄다. 밤하늘에 시선을 잠시 두는 사이 금세 기차가 사라졌다. 기다리던 사람들은 온데간데없고 어둠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꽁무니에 불빛을 달고 뒤뚱거리며 사라지는 기차가 레일과 한 몸이 된다.

삶의 여정처럼 레일 위를 달리는 저 기차에는 귀가를 서두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유를 갈구하며 떠나는 사람도 있을 터이다. 기차가 지나간 자리, 레일 위에는 지나간 청춘도 있고 사랑도 머물리라. 내가 기다리는 레일에 아직껏 기척이 없다. 달려올 기차를 뜨겁게 맞을 채비는 이미 끝난 표정이나 늦도착 한다는 안내 방송은 연신 이어진다. 몸이 허약해진 언니를 위해 지난봄부터 주말마다 기차를 탔다. 그것도 어둠을 뚫고 달리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요식업을 하는 언니의 일이 끝날 무렵에 도착하기 위해 주로 밤기차를 이용했다.

길게 누운 레일을 보면 가슴으로 기적소리가 파고든다. 철길 옆에 서면 노래 '돈데보이'가 떠오른다. 이민자의 슬픔을 노래한 '돈데보이'처럼 우리의 가슴에는 레일을 깔고 산다. 살면서 가슴을 훔치는 일이 누군들 없으랴. 누구나 한때는 사랑과 열정으로 출렁거렸을 레일이 있을 것이다. 지금 내 안에 머무는 이 열정 또한 언젠가는 식으리라는 걸 안다. 하지만 불덩이 같은 가삼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이 아닐까. 언젠가는 내 안에도 레일처럼 먹먹하게 스쳐 간 시간들이 머물게 될 것이다. 찬란한 빛으로 쓸고 간 시간들이 기차가 지나간 자리처럼 감감하게 남으리라. 밟고 지나가는 것들은 순간이지만 기차의 흔적처럼 추억이 서린 삶의 여운은 길게 남기 마련이다.

길게 이어진 레일은 우리네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열차가 레일을 이탈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중심을 잃은 채 전복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레일은 허물어지고 느슨해지는 것을 경계한다. 탄탄대로가 되기 위해서는 팽팽함을 유지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매한가지다. 한 번 연을 맺으면 서로를 유지할 수 있는 끈끈한 정과 간격이 존재해야 한다. 그 사랑을 오랫동안 유지하려면 서로가 끈을 놓지 않고 긴장해야 한다. 인생의 열차가 무사히 지나갈 수 있도록 자리를 굳건히 지켜야 한다.

지금은 어둠이 깔린 밤, 두 해만 지나가면 내 나이 지천명에 이른다. 세월 따라 달려온 나의 삶처럼 지나간 낮 동안 기차는 오고 또 지나갔을 것이다. 신산한 서른이 지나고 쉰 살이 코앞인 사십 대의 끝 선로에 서 있다. 싱싱한 고래 한 마리 같던 청춘이 잠시였다는 것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고 했다. 기적소리를 내며 멀어져 가는 저 기차처럼 잠시 하늘을 보는 사이에도 세월은 흘러가는 것이다. 인생은 레일 위를 지나가는 기차에서 바라본 풍경처럼 순간순간이 찰라일 뿐이라고 지난한 삶을 살아본 사람들은 말한다. 정말 쉰이 되면 생이 가벼워질까. 붙들 것 없이 다 내려놓는 나이에 달하면 마치 기차가 레일 위를 덜컹거리고 지나가듯 세월 가는 소리가 절로 느껴지는 것일까.

기차를 자주 타면서 사람의 가슴에도 레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도 내 가슴에는 세월을 실은 기차가 달리고 있다. 한곳만을 바라보며 달려가는 내 마음의 기차에서 그리움과 기다림을 배워 가고 있다. 기차의 당도를 알리는 종소리처럼 그리움은 늘 내 가슴을 흔들어 놓았다. 꿈과 사랑을 싣고 달리는 내 가슴은 닳고 닳은 레일처럼 터질 듯이 긴장했다. 가끔은 견딜 수 없는 육중한 무게로 와서는 가슴을 철컥철컥 밟고 지나가 생채기를 만들기도 했다.

내가 기다리던 레일 위로 기차가 들어선다. 쏜살같이 내달리는 고속 열차가 아니라 쉬엄쉬엄 간이역까지 서는 기차이다. 영양제 병이 든 까만 가방을 치켜들고 기적소리를 뿜어대는 기차에 올라섰다. 주인을 기다리던 자리를 찾아 짐짝처럼 무거운 몸을 내던졌다. 어둠을 뚫고 기차가 진동을 하며 달리기 시작한다. 차창 밖에는 불빛들이 지나간다. 얼마쯤 달렸을까? 터널 속으로 들어서자 귀가 먹먹해진다. 조용히 눈을 감고 내 마음속에 가로 놓인 레일을 생각한다.

나는 병마와 싸우고 있는 언니를 위해 레일 위를 달린다. 피로도 잊은 채 피붙이의 건강만을 생각한다. 이처럼 레일은 길과 길을 이어주고 마음과 정을 끈끈하게 이어주는 선이다. 또한 눈으로도 보이지 않는 마음의 세계, 우주까지 연결해주는 역할까지 도맡고 있다. 터널을 빠져나온 기차가 다리 위를 지나가는 진동이 느껴진다. 인생도 때로는 터널 속 어둠을 뚫고 길을 달려야 하고 사람과 세상을 이어주는 다리 또한 건너야 한다.

오늘 내가 당도할 종착역은 B도시이다. 훗날 내 인생의 종착역은 어디쯤일까. 기차가 간이역을 서서히 지나간다. 우리네 인생처럼 속도를 내지 말아야 하는 곳에서는 잠시 서행을 한다. 은행나무가 노란 가을을 매달고 있다. 머지않아 잎을 떠나보낼 나무를 배려함인지 기차는 숨을 죽인 채 스쳐간다. 스치는 모든 것들에 연민이 느껴지는 계절, 가을이다. 내 인생의 열차도 이제 막 여름을 지난 레일 위를 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