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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꿈꾸는 신발 / 우희정

꿈꾸는 신발 / 우희정  

 

 

 

삼청공원 올라가는 좁은 길목에 상점이 하나 있다. 그곳에는 누군가의 발길을 기다리는지 유별나게 눈길을 끄는 구두가 매번 진열되어 있다. 다른 구둣가게의 진열창과 다른 점은 원색의 색깔에 감히 아무나 소화하기 힘든 디자인의 구두가 서너 켤레 도드라진 포즈로 나부죽이 앉아있다. 그 품새가 평범한 사람은 주인으로 모시길 거부하며 독특한 취향의 임자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처음 몇 번은 도대체 저렇게 이상한 구두를 누가 신을까? 하며 지나쳤는데 어느 날부터 그 원색의 구두가 내 상상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신발은 어느 한 사람의 선택을 받는 순간 그의 분신이 되어 함께 길을 간다. 새 신은 발에 익숙해질 때까지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얼마 동안 길들이기를 끝낸 신발은 그 사람의 신체 일부분인 듯 주인의 성격이나 걸음걸이를 따라 닮아가며 단련을 받을 터이다. 또한 신발은 미래를 제시하기도, 어떤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 각오를 다지는 뜻으로도 신들메를 고쳐 맨다고 하듯 단지 상징성만 나타내기도 한다.

신은 원래 발을 보호하기 위하여 착용하기 시작했다. 예로부터 서민들의 짚신, 사대부의 비단신, 흙땅에서 신을 수 있는 나막신, 갖바치들의 정성이 밴 가죽신, 발 전체를 집어넣을 수 있는 장화 등 종류도 다양하게 발달해 왔다. 고분벽화에까지 나타나는 신은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백제 무녕왕릉武寧王陵에서 출토된 금동신발[金銅飾履]은 주인의 영화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영웅 테세우스는 이웃나라 트로이젠 공주의 몸에서 태어났다. 그는 신표인 가죽신과 칼을 가지고 자신의 아버지인 아테나의 아이게우스 왕을 만나러 간다. 그에게 신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징표로 쓰인다.

이사도라 던컨에게는 도전에 다름 아니다. 1900년대 초, 그때까지 당연시되어 오던 토슈즈를 벗어던짐으로써 전통 발레에서 벗어나 현대무용에로의 새로움에 도전하였던 것이다. 모험과 도전, 그러고 보니 '움직이는 사람에게는 신데렐라의 유리구두가 주어지고 그 구두를 신은 사람에게는 더 큰 기회'가 온다던 말이 생각난다.

어린 시절, 섣달 그믐날 밤 야광귀夜光鬼라는 귀신이 섬돌 위에 벗어둔 신발을 맞으면 신고 간다하여 전전긍긍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동화 속 주인공을 꿈꾸던 나는 신발을 잃어버리고 불행을 맞을까봐 걱정한 일보다 신데렐라의 유리구두가 훨씬 더 내 마음을 움직였다. 신데렐라는 신발을 잃어버림으로써 왕자를 만나지 않았는가. 새 운동화 한 켤레 얻어 신는 것도 흔치 않던 시절 왕자까지 만날 수 있는 연결고리인 구두라니, 내 상상속의 신은 꿈의 기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신발이야말로 여성들의 꿈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성들은 많은 종류의 신발을 가지고 있고 또 욕심을 부리는 것 같다. 유행에 민감하지 못한 나도 꼽아 보니 제법 여러 켤레의 구두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내 구두는 대부분 깜장색 일색이다. 매번 화려한 톤에 눈이 머물다가도 체념을 한 탓이다. 더러는 색깔과 무늬가 모두 톡톡 튀는 구두를 신고 변신을 한 번 꾀해 봤으면 하는 갈망도 있지만 고작 꿈꾸는 정도에 머문 사실들을 나 자신이 잘 안다.

20대 후반에 용기를 내어 청람색의 망사구두를 한 번 가져 본 적이 있긴 하다. 쪽빛의 아른아른한 망사를 감싸 안듯 같은 색깔의 가죽이 얌전히 테를 두른 그 구두는, 손꼽을 정도로 내 발과 조우를 하다가 어느 날 소박데기가 되어 내 생활 밖으로 밀려났다.

며칠 전 인사동 삼지길 깊숙한 곳의 쇼윈도 앞에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그곳 진열창의 구두 역시 삼청동 그 가게만큼 이색적이어서 잠시 발길을 멈춘 참이었다. 올여름에는 샌들이 화려함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고 했는데 과연 그곳에 있는 구두는 눈부시도록 곱고 강렬했다. 넘치는 열정을 내뿜듯 원색의 물결이 출렁거렸다. , 나비, 동물무의에 대담한 보석장식까지. 굽도 코르크, 원목 따위로 다양하고 바닥에 활짝 핀 꽃잎이 아롱진 것도 있었다.

차마 안으로 들어갈 용기를 내지 못하고 남의 세계를 엿보듯 기웃거리다 우연히 젊은 연인이 구두를 고르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신중히 구두를 고르는 어깨 넓은 청년과 흘러내리는 긴 머리카락을 연신 쓸어 올리는 처녀가 참으로 잘 어울려 보였다. 유리창 한 겹을 통해 바라보는 그곳은 다분히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해 나에게 뭉클한 감동을 주었다.

나는 그곳에 서서 어쩌면 저 젊은 연인이 구두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구두가 그 연인들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음전하게, 수동적으로 선택되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들 나름의 꿈을 가지고 제각기 다른 모양과 색깔로 에너지를 뿜으며 자신을 분신처럼 소중히 여겨줄 사람과 함께 어울리기를 기도하고 있을지도.

오늘도 신발들은 유리창 너머의 세상을 향해 스스로의 꿈을 키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