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렛대 / 문경희
주산 구릉이 그리는 스카이라인은 관능적이다. 홑 것만 걸친 여인의 몸선 같이 은은하게 드러나는 산의 굴곡은 고혹적이기까지 하다. 젖무덤처럼 봉긋 솟아오른 능과 능은 산이 산을 업은 듯 웅대하고, 능을 감고 도는 황토색 속살은 전인미답의 처녀지처럼 은밀해 보인다. 인간은 유구하되 인간을 품어 안은 자연은 무구하기에 까마득히 사라져 간 한 나라의 역사를 아직도 저리 선연하게 적고 있는가 보다.
역사란 시간의 뼈를 추스리는 일이다. 어제라는, 비활성화된 시간 속에서 오늘과 내일을 읽어내는 작업이랄까. 도도하게 흘러 왔을 세월의 허리께를 무처럼 숭덩 잘라 놓고 그 속에서 흥망성쇠의 지극한 파노라마를 들여다본다. 사라진 왕국을 일으켜 세우고 사람과, 사람이 만들어 내는 풍경을 되살린다. 실존하지 않는 세상은 분명 가상이지만 이러한 작업을 두고 어느 누구도 가상이라 토를 달지않는 것은 지나간 이들의 숨결이 오롯이 담겨 있는 기왓장 하나, 접시 한 조각의 힘인지도 모른다. 하여, 잠시나마 그 시대, 그 사람들의 자취를 더듬어 과거 속으로의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닐까.
모 단체에서 주관하는 가야 문화 탐방 길을 따라나선 참이다. 가야의 옛터를 두르고 그 후예로 살고 있으면서도 막상은 등잔 밑이 어두웠던 실상을 떨쳐 낼 기회라 싶었다.
아라가야의 고장인 함안을 거쳐, 대가야의 도읍지 고령에 도착했다. 낙동강의 지류를 낀 비옥한 토지 위에 건국된 대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각축을 벌이는 와중에서도 나름의 시대를 야침 차게 구가했던 철의 왕국이다. 그런들, 야로, 즉 쇠로 불리는 화로라는 뜻을 가진 지명이 아직도 버젓이 남아있을 정도로 번성했던 국가의 면모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사료조차 변변치 않은 탓에 신라에 편입되기 전의 오백여 년에 이르는 역사는 세월 속으로 밀봉되어버린 지경이란다. 실상을 증명하듯 대가야박물관과 주변의 고분군만이 그들의 오랜 역사를 담담히 쓰고 있다. 승자의 역사는 찬란한 반면 패자는 늘 승자의 그림자에 묻혀버리기 마련인 냉엄한 이치를 또 한 번 읽는다.
왕릉 전시관에 들었다. 규모나 껴묻거리의 정도로 볼 때 지금까지 발굴된 가야 고분 중 최고의 위계位階를 가진 왕릉으로 추정된다는 지산동 44호 고분을 고스란히 복원해 놓은 곳이라니, 죽어 넘는다는 이승의 문턱을 살아서 넘어 보는 셈이다. 땅 위의 영광을 땅속으로 대물림하듯, 무덤의 중인이 생전에 아끼던 물건과 가까이 거느리던 사람들까지 생사를 같이했단다. 죽음을 같이 할 수 있는 동지를 구하기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고 보면 사십 명 이상의 순장자가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는 무덤의 주인은 어쨌거나 대단한 사람이었던 게 틀림없다. 깔딱, 숨줄만 놓으면 될 것을 과외의 행장 탓에 지엄하기로 자자한 저승길이 족히 한나절은 지체되었을 법하다.
그런들 삶의 끝자락에서 맞닥트리는 세상은 입문의 절차가 꽤나 까다로웠던가 보다. 몸 뒤짐을 하듯 부도, 권력도, 지위도 추려내고 오로지 세상으로 출出하던 모습 그대로의 귀환만을 요구했던 것은 아닐까. 공수래공수거의 지엄한 계율을 그도 어쩌지 못했던지 사람은 간 곳 없고 바리바리 꾸려간 행장만 덩그러니 주인의 빈자리를 지키고 있다.
'죽음만이 영원합니다.'
능선을 따라 200여 기의 크고 작은 분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지산동 고분군은 버스 속에서 인솔자가 누누이 강조하던 죽음이라는 추상명사가 추상의 옷을 벗어 버리는 곳이다. 산자락을 뒤덮고 있는 거대 묘의 군단을 보면 죽음이란 단연코 실제상황이다. 이 순간, 삶은 낭자한 죽음의 완연한 보색이며 지극한 정靜의 세계를 떨치는 소리요, 몸짓이다. 역사란 같은 무게로 존재하는 삶과 죽음, 생과 멸의 두 극점이 맞물리며 써내려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설핏 든다.
터벅터벅 고분군을 들어서자 사방 낯익은 필치가 화폭처럼 펼쳐진다. 평범한 여인들의 나신을 과하리만큼 풍성한 곡선으로 그려 내었던 르느와르. 세상에 존재하는 선이란 오로지 하나밖에 없다는 듯 사람도, 사물도 부드러운 곡각曲角의 조화 속에 가두어 버린 그의 손끝을 따라 내 안의 모서리도 얼마간은 지워지는 듯했다. 그런 르느와르의 나부裸婦들을 대가야의 역사가 스며 있는 엄숙한 터에서 읽는다면 불경의 죄로 엄히 다스릴까마는. '그림 속에서 가난한 자는 없다.'는 것이 르느와르의 지론이라면 이미 세상의 모든 잣대가 무의미해지는 이 공간이야말로 그를 읽어 내리기에 적격이 아니랴.
시끌벅적한 세상 소리들이 비켜 간 절해고도이듯 주위는 고요하기만 하다. 오래된 묵정밭처럼 기억에서 지워져 가는 일국의 처지를 대변하며 개망초가 무성한 봉분 위로 무심한 바람만 나지막이 깔린다. 어느 시인은 개망초를 두고 '아름다운 굴욕으로 내일을 산다.'라고 읊었으니 무너진 왕국에 대한 조문으로 이만한 꽃도 없지 싶다. 비록 역사의 뒤안길로 지워지는 일만 남았다 하더라도 대자연은 저렇듯 잊지 않고 철마다 꽃을 피워 그들의 깊은 잠을 위무해 주고 있으니 무작정 서럽지만은 않을 듯하다.
시간을 에돌아 어제와 어제의 사람들을 만나본 오늘. 역사의 깊이가 한층 살갑게 다가온다. 강물처럼 시야를 벗어나 멀리 흘러가 버렸다고 해도 과거란 언제나 간단치 않은 현재를 든든히 괴는 지렛대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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