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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특별한 인생 / 박명순

특별한 인생 / 박명순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속에 꿈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비록 그 꿈이 이루어지기 힘든 것이라고 해도 열심히 노력하다가 보면 언젠가는 이루어지는 날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어린 시절, 나에게는 먼 훗날에 대학을 나와서 훌륭한 소설가가 되고 싶은 꿈을 꾸면서 살아왔다. 그 시절 시골에는 교과서 외에는 읽을 만한 책이 없었다. 집안 오빠나 아저씨가 외지에 나가서 공부를 하다가 방학 때 가져온 세계명작 소설을 빌려서 밤을 새워서 읽었다. 읽다가 보면 어느 새 내가 소설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읽을수록 재미가 있었다.

우리 집에서는 3년마다 나 때문에 한 번씩 큰 난리가 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중학교 진학을 하려고 하니 할아버지가 못 가게 하셨다. 여자는 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시면서 집안일이나 잘 배우라고 하셨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 기가 막혔다. 친구들은 중학교에 가는데 나만 못 가게 생겼다. 며칠 동안을 울면서 밥도 먹지 않았다. 결국 할아버지는 마지못해 허락을 하셨다.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두 번 째 소동을 거치고 고등학교 3학년 졸업반이 되었을 때 할아버지께 대학에 보내달라고 했었다. 아버지가 안 계시니 우리 집의 모든 일은 할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져야만 했다. 그 때 할아버지의 표정은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라 생각을 했었는데, 너무 기가 막혀서 금방 돌아가실 것 같았다.

돈 버는 애비도 없는데 뭘로 대학에 갈래?” 기운이 하나도 없는 말씀이었다.

소 팔고 논 팔아서 보내주이소.”

내 말을 들으신 할아버지는 겁에 질려있는 어머니를 보고 말씀하셨다.

애미야, 니 딸 데리고 빨리 나가거라.”

할아버지는 손녀도 미웠지만, 딸을 나무라지 않는 며느리가 더 미워서 우리 모녀를 쫓아내려는 것이었다. 사색이 되신 어머니가 내 손을 끌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울면서 나를 달랬다. 손자도 아닌 손녀를 절대로 대학을 보내주지 않을 것이니 그만 마음을 접으라고 하셨다. 나보다 어머니 마음이 더 아팠을 것이다.

이번에는 울어도 단식투쟁도 효과가 없을 것 같았다. 집에 있자니 속에서 불이 나서 빨랫감을 모아서 강가로 나갔다. 사람들이 모여서 떠들면서 빨래를 하다가 내가 가니까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내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잠시 후, 한 아주머니가 나를 보고 말했다.

야야, 니는 간도 크지. 소 팔고 논 팔아서 대학 간다고 했다면서.” 그 순간 참고 있던 화가 폭발을 했다.

남이사 소를 팔건 땅을 팔건 무슨 상관인데요.” 화가 나서 빨래를 방망이로 마구 두들겼더니 빨랫감이 다 떨어졌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에 우리 고향에서 여자 대학생은 딱 두 사람이었다. 하나는 면장님 딸이고, 하나는 양조장 집 딸이었다. 그러니 대학은 내가 올라가지 못할 나무였다.

할아버지 친구 분의 중매로 결혼을 했다. 물론 할아버지가 고른 혼처였다.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자랐으니 시아버지 사랑받고 종가의 며느리로 대접받고 잘 살아가라는 뜻에서였다. 할아버지로서는 아마도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짐작은 했지만, 내 시집살이는 녹녹치 않았다. 날마다 전쟁 같은 날들이 흘러갔다. 이십대의 새댁은 어느 새 오십이 넘은 할머니가 되었다. 날마다 되풀이 되는 집안 행사, 제사 차리고 제기를 닦고 한 지 사 십년이 되었다. 내가 이러다가 죽으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도 대학에 가서 국문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남편은 되면(합격) 보내주지.” 건성으로 대답을 했다.

남편은 내가 진짜로 갈 줄은 몰랐을 것이다. 속으로는 턱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식구들 중에서 막내인 딸이 적극적으로 지지를 했다. 막상 결심은 했지만 그건 내 일생에 큰 모험이었다. 어쩌면 무모한 도전이었다.

내가 지원한 대학에 나이가 많은 사람이 몇 명이나 지원을 했느냐고 물어보았다. 사십대가 네 사람, 오십대가 한 사람이라고 알려주어서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오십대 한 사람은 내가 틀림없었다. 만약에 내가 합격을 한다면 그 사람들과 같이 공부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합격자 발표가 있는 날, “합격하셨습니다,” 하는 소리를 듣고 너무 기뻐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큰일을 저질렀다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드디어 입학식 날, 온 사방을 둘러보아도 어른은 나 하나뿐이었고, 고등학생 티가 나는 어린 학생들만 가득했다. 기가 막혔다. 내 딸 보다도 어린 학생들 틈에서 나이 많은 내가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지 걱정이 태산 같았다.

걱정이 되는 것은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날마다 만나야하는데, 나를 어떻게 불러야할지 호칭이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뭐라고 부르면 됩니까?” 과대표인 여학생이 웃으면서 물었다.

글쎄, 뭐 아줌마라고 부르던지 내 이름을 부르던지 너희들 마음대로 불러라.”

그 여학생은 그래도 자기들이 지성인인데 어떻게 아줌마라고 하겠느냐면서 모여서 의논을 했다. 그러더니 앞으로 이모라고 부르겠다고 했다.

내 평생을 별러서 들어간 대학생활은 참으로 만만하지 않았다. 살림하랴, 그 많은 제사 준비하랴, 뒷설거지가 힘들어서 금방 치우고 싶은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2학년 초 3월에 딸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 국문학을 전공한 딸이 그 동안 내 과외선생님이었다. 직장에서 퇴근하면 모르는 문제를 늘 물었다. 내가 졸업할 때 까지 도와주면 좋을 텐데 결혼을 한다니 내 일이 걱정이었다. 딸을 보내는 섭섭함과 내 공부를 도와주지 못하는 일까지 겹쳐서 남모르게 많이 울었다.

딸이 집에 없으니 아쉬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동안 아무 것도 못한다고 나무라기만 했던 일이 후회되었다. 딸이 결혼하고 나서 나도 학교를 그만 둘까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힘들다고 중간에 그만 두면 남편이나 자식들 보기에 체면이 서지 않을 것 같았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 만나는 사람들이 내게 물었다.

"요즘에 보험이 잘 됩니까?"

나는 얼떨결에 ""하고 대답을 했다. 큰 가방을 들고 나가니 보험회사에 출근을 하는 줄 알고 있었다. 이 나이에 대학에 다닌다고 하기가 창피했었다.

그런 저런 어려움을 참고 견디면서 4년을 보냈다. 그 동안의 일들을 기록하면 책이 한 권도 모자랄 것이다. 내 스스로 선택한 일이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졸업식 날, 2월인데도 밤새 눈이 하얗게 내렸다. 그 날의 눈은 내게는 분명히 다른 날과 다른 느낌을 주었다. 눈이 그렇게 많이 왔는데도 친구들 부부는 내 졸업을 축하해주려고 우리 가족보다 먼저 모여 있었다.

국문학과 졸업생들은 대강당에서 졸업식을 하기 한 시간 전에 강의실로 모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학과장님이신 S교수님께서 졸업식이 끝나면 가족들과 사진촬영이다, 점심을 먹는다 해서 뿔뿔이 흩어지니까 국문학과에서는 미리 모여서 사제지간에 인사를 나누고 서로 축하도 하자는 뜻에서였다.

강의실에는 졸업생, 교수님들, 가족들로 가득 찼다. S교수님은 졸업생에게 직접 졸업장을 건네주면서 악수를 하면서 축하를 해 주셨다. 내 차례가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내 오래된 꿈이 이루어진다고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나려는 걸 억지로 참고 졸업장을 받으러 나갔다.

박명순 여사가 졸업을 하게 되어서 어젯밤에 4년 동안의 성적을 열람해 보았는데 열심히 하셔서 성적이 아주 좋았습니다. 결석이 많았는데, 제사 모시느라 그랬으니, 교수회의에서 결석처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박수 한 번 쳐 드립시다.” 순간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S교수님은 내게 졸업장을 건네주시면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셨다.

나가셔서 자서전 한 권 쓰십시오. 특별한 인생을 살아 오셨으니까요.”

교수님은 그렇게 말씀을 하셨지만 내가 무사히 졸업을 하는 것은 인심 후한 교수님들과 착한 학생들 덕분이었다.

나이 많은 사람이 무엇을 잘 하겠는가. 그저 4년을 왔다 갔다 하다가 다른 학생들이 졸업을 하니까 묻어서 같이 졸업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튿날, 혼자 친정 조, 부모님 산소에 갔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 가끔 찾아가는 곳이다. 그 쪽에는 북쪽이라 눈이 더 많이 내려서 얼어붙었다.

먼저 할아버지 산소 앞에 졸업장을 올려놓았다. 내 앞에 계신다면 무슨 말씀을 하실지 모르겠다. 다음은 어머니 산소에 졸업장을 펴 놓았다. 완고한 시아버지와 극성스러운 딸년 사이에서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셨을까. 어머니가 살아계셨으면 칭찬보다는 사서 고생을 한다고 적극적으로 말렸을 것이다.

새하얀 눈을 덮어쓴 어머니의 산소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고 싶은 말도 많았는데 전할 길이 없었다. 그게 한없이 서러웠다. 꽁꽁 얼어붙은 눈 위에서 하염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