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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거미의 건축법 / 권민정

거미의 건축법 / 권민정  

 

 

 

소나기가 한바탕 지나간 후였다. 빗물이 들이칠까 하여 닫았던 창문과 베란다 문을 열었다. 스무 평 남짓한 작은 시골 살림집이지만 앞마당에는 넓은 잔디가 깔리고 키 큰 야자나무와 단풍, 무화과나무가 서 있다. 더운 날씨에 축 처져 있던 나무들이 샤워를 마친 처녀처럼 상큼해져서 마치 젖은 머리를 말리려는 듯 바람에 물보라를 날리고 있다.

잘 열지 않은 뒷문을 열다가 무심코 뒷마당을 보았다. 제주의 담은 현무암으로 쌓은 것이라 바람이 잘 통해서 아주 좁은 뒷마당에도 나무들이 자라 무성하다. 돌배나무와 이름을 알 수 없는 키 작은 나무들, 그 아래에는 머위가 땅을 가득 덮고 있다. 거기에서 처음 보는 신비로운 조형물을 보았다.

물을 방울방울 머금고 있는 거미집이었다. 지름이 80cm는 될 것 같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정성을 다해 만든 것인지 둥근 거미집이 가로 세로 정교한 기하학적 무늬로 짜여 있었다. 그 거미줄 하나하나에 작고 투명한 물방울들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는 것이다.

 

송알송알 싸리 잎에 은구슬

조롱조롱 거미줄에 옥구슬

 

어릴 때 부르던 동요가 저절로 흥얼거려졌다.

거미가 어디 있나 찾아보았더니 제일 위쪽 줄 구석에 조용히 웅크린 채 달라붙어 있다. 나는 그 집 앞을 떠나기 싫어 아예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았다.

허공에 짓는 집, 그 작은 몸 어디에 저렇게 많은 건축자재가 있어 이토록 큰 집을 지었을까? 나무와 나무 사이, 잎들을 배경으로 하여 집을 지을 때 어둡고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조용한 뒷마당에 터를 잡았겠지. 몸속, 꽁무니에서 실을 빼내어 나무 사이에 기초줄을 잇고 뼈대인 세로줄을 친 다음 저렇게 촘촘하게 가로줄을 이어갈 때부터 그의 조상에게서 내려온 설계도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틀을 맞춰갔을까?

아니 어쩌면 저건 아라크네가 변신한 거미일지도 모른다. 미네르바 여신과 베 짜기 시합을 할 때 베틀에 올라가 날실을 걸고 부티를 허리에 감고 잉아에 날실을 꿴 다음 재바른 손놀림으로 씨실을 북에다 물려 날실 사이에 밀어 넣던, 그 훌륭한 솜씨에 베 짜는 여신 미네르바조차 이길 수 없었지. 화가 난 여신은 아라크네의 몸에 독초 즙을 뿌렸고 그러자 아라크네의 머리에서는 머리카락이 빠지면서 코와 입이 없어졌다. 머리는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줄어들었고 몸통도 아주 조그맣게 줄어들었지. 갸름하던 손가락은 양옆으로 길어져 다리가 되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배가 되고 말았어.

평소 징그럽게 보이던 거미의 모습이 베 짜는 처녀, 유능한 건축가처럼 다시 보였다. 시인 휘트먼이 거미를 가리켜 '조용하고 참을 수 있는' 존재라 칭송했던 것도 생각났다.

바람이 불었다. 물방울 무게 때문인지 바람 때문인지 집이 철렁하며 동그랗던 집 모양이 타원형으로 되었지만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다. 유연하고도 단단한 집이다. 그 속에서 먹이도 구하고 안식도 취하는 기막히게 잘 지은 집이다.

집 때문에 고민이 많은 우리 아이들 생각이 났다. 결혼하여 몇 년 동안 열심히 맞벌이하여 이제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나 했는데 너무 터무니없이 집값이 올라버려 다시 셋집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무리 절약하고 돈을 모아도 턱없이 가파르게 오르는 집값 때문에 절망하는 젊은이들. 그들 몸속에서도 건축자재가 원할 때마다 무궁하게 나와서 어디 좋은 빈자리 잡아 예쁜 집을 지어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터무니없는 생각에 잠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