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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이중주 / 심명옥

이중주 / 심명옥

 

 

 

늦은 밤, 기타소리가 거실 공기 속으로 퍼져 나간다. 그 소리는 낮 동안의 부산스러움을 잠재우며 젊은 날 누군가의 갈망을 향해 조용조용 켜를 쌓아간다. 클래식 기타를 갖고 노는 남자의 얼굴엔 파릇파릇 생기가 돈다.

 

타닥타닥,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반쯤 열어놓은 서재 문을 빠져나와 기타소리 밑으로 깔린다. 의자에 엉덩이를 깊숙이 들이밀고 언어를 찾아 골똘해진 얼굴, 작가 못지않다. 두서없이 삐져나오는 말들을 쳐대는 여자의 얼굴이 환하다.

 

띵기띵기, 타닥타닥. 깊은 밤이 되도록 소리는 멈출 줄 모른다. 기타를 치는 남자는 기억 사이 걷고 있는 여자를 느끼고, 글을 쓰는 여자는 집안을 채우는 남자의 소리에 감싸인다. 악보가 틀려 잠시 쉬었다가 가도, 생각이 안 나 몇 줄 두드리다 이내 다른 생각에 빠지더라도 각자 갖고 노는 시간을 방해하지 않는다. 하루를 닫으며 각자에게 집중해 가는 시간, 서로를 느끼면서도 더없이 편안하다.

 

살면서 이토록 편안했던 순간이 있었던가. 시간을 수평으로 펼쳐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예민했던 순간들이 휙휙 스쳐 지나간다. 술 마시지 말라고, 아이들과 놀아달라고, 함께 무언가를 하자고 너보다는 나에 초점을 맞춰 서로의 시간에 욕심을 냈다. 함께하고픈 시간에 대한 갈증은 때론 갈등을 불러일으켜 생채기를 남기기도 했다.

 

몰랐다, 젊었을 땐. 뭐든 공유하는 게 많을수록 사랑의 질량이 큰 줄 알았다. 느슨한 시간을 타고 서로에게 스며드는 사랑은 건조하다 생각했다. 탱탱한 힘줄로 선 감정만 빛이 나고, 서로의 생활 반경을 많이 아는 게 애정의 척도인 양 생각도 했다.

 

50이 넘어선 남자와 여자의 사랑은 밋밋하기 그지없다. 사랑한다는 말을 주고받지 않고, 뭔가를 함께 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때론 공통분모가 너무 없으면 흔들리지 않느냐고 질문을 받지만 덤덤하게 넘긴다. 색으로 따진다면 여자와 남자의 사랑은 무채색에 가깝다.

 

그렇다고 허전한가. 분명 함께 있는 시간은 적은데 마음은 오히려 꽉 찬다. 서로의 일상을 많이 알았던 때보다 훨씬 상대에 대한 이해도 높고, 배려도 깊다. 무조건 함께하기보다 상대가 빛나고 행복해하는 시공에 있게 헤아려 준다. 나로, 너로 혹은 너로, 나로 존재하는 모습을 보며 뿌듯해한다. 비로소 존재 자체가 갖는 힘을 온전히 이해한다.

 

갈증도 없다. 짬이 나면 언제든 상대방의 글을 읽어 보고 연주를 귀 기울여 들으며 서로에게 다가간다. 함께 가정을 일구느라 바빠 놓친 서로의 꿈을 다독이며 벙싯 웃는다. 신뢰를 가득 담은 눈빛을 교환하다 기분 좋으면 입에 발린 칭찬으로 서로를 살짝 들뜨게도 한다. 헛말인 줄 알면서도 기분은 좋다. 진실이야 이웃집에 두고 와도 상관없지 않나.

 

함께해온 시간은 든든한 자산이다. 그들은 한때 풋풋하거나 간절하거나 열렬하거나 치열했던 순간을 지나왔다. 그러기에 남자와 여자는 언제든 서로에게 각인되어 있는 순간을 꺼내 비슷한 감성을 녹여낼 수 있다. 가끔은 기꺼이 서로의 배경으로 서기도 하겠지. 수많은 시간을 돌아 젊은 날의 꿈 앞에서 밤마다 서성이는 남자와 여자의 이중주는 매우 느리게 연주될 것이다. 느릿느릿 그들만의 시공에서 순서 없이, 목적 없이.

 

기대되는 이중주다. 격정의 시간을 지나 본격적인 2라운드에 접어든 느낌이다. 지금이 지나면 부부가 살아가는 모습이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지만, 중년의 남자와 여자가 조율해 나가는 시간들은 더없이 잔잔하다. 이질적인 기타소리와 자판 소리가 늦은 밤을 편안하게 채워 가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