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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잡초 / 박경대

잡초 / 박경대

 

 

 

아차하는 순간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금세 장갑 밖으로 붉은 피가 배여 나왔다. 나도 모르게 내뱉은 작은 외마디 소리를 어떻게 들었던지 근처에서 일하던 J형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장갑을 벗었다.

그날은 무척 더웠다. 얼려서 가지고 온 생수가 금세 녹을 정도였다. 칠월 한낮 볕에는 가리개 모자도 무용지물이라 오후 내내 얼굴이 후끈거렸다. 연신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잡초와 씨름을 하던 중 폭염주의보가 발령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어지러워 좀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그때 몇 결음 앞에 하프라인이 보여 그곳까지 풀을 뽑기로 하였다. 뒤뚱거리는 오리걸음으로 도착한 목표지점에는 쑥이 무리를 지어 있었다. 한 손 가득 움켜잡고 호미를 내리꽂는 순간, 흰 라인에 반사된 강한 햇살에 머리가 아득해지면서 손을 쳐버리고 말았다.

몇 년 전, 오랫동안 취미 삼아 해오던 사진 촬영이 뜻대로 되지 않는가 싶더니 카메라를 보는 것조차 싫어졌다. 슬럼프에 빠진 것이다. 하지만 몇 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현상이라 큰 걱정을 하지 않고 무심히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차, 언젠가 전원생활을 하게 되면 도움이 될듯하여 조경에 관한 공부를 일 년쯤 하였더니 자격증 하나가 생겼다. 그때 마침 멀지 않은 축구장에 잔디와 조경수를 관리할 요원을 뽑으니 원서를 내보라고 학원에서 연락이 왔다.

취직을 하기 위해 배웠던 것이 아니어서 흘려들었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내는 펄쩍 뛰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밥을 먹고 온종일 TV를 끼고 있는 남편이 답답하게 보였으리라. 그런 나를 내보내고 싶어 아내는 봉급의 다소와 근무내용을 막론하고 응시해보라며 연일 채근하였다. 결국,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낸 원서였는데 운이 좋았던지 용케 합격 통지를 받은 것이다. 잡초와의 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잔디 구장에 무슨 힘든 게 있으랴 생각했건만 예상외로 할 일이 많았다. 매일 물을 주고, 규격에 맞도록 잔디를 깎아야 했다. 비료도 수시로 뿌렸고 경기가 있었던 다음 날은 보식하여 상처투성이의 구장을 손질하였다. 또한, 땅심을 돋우고 숨수멍을 내주기 위해 천공과 모래 뗏맙을 넣기도 했다. 잔디를 관리하는 일이 한둘이 아니고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었지만 가장 힘든 일이 잡초 제거였다.

날마다 들쑤시고 캐어내도 다음 날이면 또 어김없이 머리를 내미는 질긴 놈들이었다. 어느 바람결에 날아왔는지, 어디에서 묻어왔는지, 잔디 사이에 숨어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또끼풀과 쇠뜨기, 매듭 풀에다 냉이도 보이고 이름 모르는 들풀과 버섯까지 눈에 띄었다. 비료도 주지 않는 그들이지만 매일같이 돌보는 잔디보다 더 생장이 빠르고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왕성하게 자란 잡초를 캐낼 때면 후련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안쓰러웠다. 깻잎 밭에 쑥이 나면 쑥은 잡초가 되고 쑥을 재배하는 곳에 깻잎이 싹을 틔우면 깻잎은 뽑히는 것처럼, 그들도 필요로 하는 곳에서 싹을 틔웠더라면 보살핌을 받았을 텐데 자리를 잘못 잡은 탓에 미움을 받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잡초로 취급받아 뽑히는 풀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사실 그들 중 상당수가 한방의 약재로 사용된다. 소리쟁이나 쇠비름 그리고 환삼덩굴은 고혈압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게다가 먹을 수 있는 잡초도 많다. 방가지똥은 물에 씻어 그냥 쌈으로 먹고 부침개를 해 먹기도 한다. 또한, 강아지풀과 토끼풀, 심지어 논에서는 골칫거리인 피까지 먹는다. 골골한 사람을 보고 피죽도 못 먹느냐 하는 말은 어렵던 보릿고개 시절에는 그것도 먹었다는 방증이리라.

이처럼 자연의 모든 생명체는 물론 심지어 무생물까지도 어느 용도에서는 꼭 필요한 존재이다. 다만 적당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면 버려지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러한데 사람이라고 다를까.

하루가 멀다고 오리처럼 걸으며 잡초를 캐내는 작업이 힘들다. 금방이라도 호미를 던져버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무릎과 발목에도 고통이 느껴진다. 허리를 펴기 위해 일어나면 한없이 넓어 보이는 구장에 한숨이 절로 난다. 아지랑이 피는 구장을 보고 있으면 예전 한때 머룰렀던 아프리카의 대평원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삼사십 대의 젊은 시절, 세상이 좁다 하고 활개를 치며 다녔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의 모습이 무척 초라해 보인다. 손에 들려 있는 잡초처럼 나 역시 사회에서 별 쓸모없는 한갓 잡풀 신세가 되어가는 것 같아 착잡하다.

피 묻은 장갑을 벗겨내고 상처 난 검지가 드러났다. 오른손으로 지압하는 동안 J형이 손가락을 소독하려는 듯 생수를 부은 뒤 버리려던 쑥 몇 닢을 씻어 비볐다. 짓이긴 쑥을 상처에 붙이고 지갑에서 일회용 반창고 하나를 꺼내어 감았다. J형이 치료가 끝났다면서 싱긋 웃었다.

상처를 감싸고 있는 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성가신 잡초로만 여겼던 쑥으로 찢어진 손가락을 치료하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문득 나 역시 이 쑥과 비슷한 처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풀밭에 자라나는 여러 가지 들풀이 약초가 되느냐 잡초로 남느냐의 판단은 쓰이는 용도에서 결정되는 것이리라. 일하면서 나의 존재가 차츰 잡초처럼 되어 간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처럼 나 스스로 이 일에 정을 붙이지 못하면 그 순간부터는 이곳에 존재할 필요가 없는 잡초가 될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이 쑥처럼 나의 자리가 어디든 최선을 다하여 꼭 필요한 역초가 되고 싶다. 설령 긴 슬럼프가 끝나는 날이 오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