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십자가 / 민명자
낮 시간이라서 그런지 전동차에는 군데군데 자리가 비어 있다. 내가 앉아 있는 맞은편 자리에는 교복을 입은 여학생 세 명이 나란히 앉아 참새처럼 재잘대고, 그 옆의 할머니는 손자인 듯한 아이를 달래고 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웃는 사람, 손놀림도 빠르게 문자를 보내는 사람, 표정과 몸짓이 각양각색이다.
한가한 분위기가 깨진 건 전동차가 역에 정차하고서였다. 차내에 들어선 노인 한 분이 시선을 끈다. 검은 바지와 흰 셔츠에 붉은 조끼를 입고 한 손엔 십자가 팻말을 들었다. 차가 출발하자마자 노인이 십자가를 높이 들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친다.
“회개하라. 종말이 다가왔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고는 여학생들이 앉아있는 자리로 다가간다.
“학생들, 예수 믿어야 천당 가.”
노인은 세례를 주듯 여학생들의 머리에 차례차례 손을 얹고 기도를 한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여학생들은 겉으로 드러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킥킥대며 웃음을 참느라 애쓴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보니 슬며시 웃음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노인이 외치던 단어가 못다 푼 숙제처럼 머릿속을 맴돈다. ‘구원? ….’
하긴, 이런 광경이 낯설지만은 않다. 일전에는 서울역 광장에서 한 남성이 색소폰으로 성가를 연주하고 있었다. 연주가 끝나자 이번엔 말쑥하게 차려입은 여성이 마이크를 잡고 목청 높여 성가를 불렀다. 이들 옆에는 ‘○○교’를 믿지 않으면 ‘불신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쓰인 글귀가 협박인 듯 호소인 듯 펄럭였다. 또 다른 저쪽에선 이에 질세라 아주머니 한 분이 ‘○○교’를 믿고 구원을 받으라며 자신이 신봉하는 종교를 전도했다. 저들의 지치지 않는 열정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만나기로 한 친구가 늦어지는 바람에 나는 한참동안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종교뿐 아니라 예술에서도 구원은 늘 화두가 되어왔다. 미켈란젤로는 「피에타」로 구원의 모상을 조각했고, 베르디는 「레퀴엠」으로 죽은 자를 애도하며 구원을 노래했다. 괴테는 젊은 시절에 시작한 「파우스트」를 평생에 걸쳐 집필하면서 영혼구원의 문제에 몰두했고, 김동리는 「사반의 십자가」에서 신과 인간과 구원의 문제에 질문을 던졌다. 그밖에도 수많은 예술가들이 구원을 표상했다. 직접 천명하진 않더라도 예술행위 언저리엔 구원의식의 그림자가 따라 다닌다. 이처럼 숱한 종교와 예술이 구원을 말해왔는데 세상은 왜 점점 황폐해지는 걸까.
나는 광장이 보이는 계단에 서서 잠시 카프카의 단편소설 「법(율법) 앞에서」를 떠올렸다. 그리고 집에 와서 다시 읽었다. 법 앞에 문지기가 서있고 시골사람 하나가 와서 법 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거절당한다. 법으로 들어가는 문은 열려있지만 입구의 문지기 말대로라면 “방을 하나 지날 때마다 새로운 문지기가 서 있는데, 갈수록 그 힘은 막강”해진다. 시골남자는 입장허가를 받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작정한다. 그 문에 들어가기 위해 자기가 가진 값진 것들을 문지기에게 바치며 틈나는 대로 조른다. 나중에는 문지기의 외투 깃에 붙은 벼룩에게까지 간청하지만 끝내 들어가지 못한다. 시력이 약해져 문에서 새어나오는 빛만을 겨우 볼 수 있게 된 남자가 죽음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문지기에게 묻는다. “여러 해 동안 나 말고는 들여보내 달라는 사람이 없으니 어쩐 일”이냐고. 문지기는 죽어가는 남자의 귀에 대고 고함을 지른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이 안에 들어갈 수 없소. 이 입구는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나는 이제 문을 닫고 가겠소.”라고.
다른 사람에겐 별로 가치가 없지만 오직 자신만이 값지다고 여기는 것, 평생 갈구하며 그 문 앞에서 서성대게 하는 것, 법이라는 이름은 사람에 따라 달리 읽힐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종교든 예술이든 돈이든 권력이든, 무엇이 진정한 가치가 있는지 선택하는 것은 본인이다. 그러나 그 문에 아예 들어갈 수 없거나, 한 걸음씩 가까워질수록 더 큰 욕구로 갈증을 불러일으키는, 매달릴수록 눈 멀어 더 소중한 것을 잃게 하고 점점 막강한 힘으로 인생을 지배하는, 그것은 끝까지 도달할 수 없는 미완의 기표다. 나는 ‘법’을 ‘구원’이라 고쳐 읽는다. 구원은 내게도 문 안의 법과 같은 기호이니까.
광장은 목마른 사람들의 집합소이자 쉼터인 것처럼 보였다. 역사(驛舍)로 이어지는 계단에 사람들이 군데군데 앉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어떤 이는 맥없이 담배를 피우며 하늘을 쳐다보고, 또 어떤 이는 노래를 흥얼흥얼 따라 부르기도 했다. 다른 한쪽에선 두런두런 둘러앉아 얘기를 주고받는 사람들, 허름한 차림새로 보아 노숙자 같았다. 그 틈에는 여자도 한 명 있고, 노인도 한 명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노숙자들에겐 고단한 몸을 눕힐 편안한 잠자리와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할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이, 걸인에겐 돈 한 푼이, 또 어떤 이에겐 영혼을 달래줄 따듯한 말 한마디나 사랑 한 숟가락이 구원의 지푸라기가 될지도 모른다. 저들에게 문학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구원을 외치는 사람들과는 무관하게 역사 쪽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바삐 오르내리며 무심히 광장으로 밀려가고 밀려오는 인파, 그 어깨위로 ‘구 · 원’이라는 단어의 초성과 중성과 종성들이 낱낱이 흩어져 부서져 내리는 듯했다.
출발지와 종착지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몸담고 살아가며 흩어지고 모이는, 거대한 광장과 같은 이 세상. 그 안에서 부유하는 사람들이 통과해야할 문은 제각기 다른 빛깔로 닫혀 있다. 이 시대의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유용함의 무용함과 무용지용(無用之用)의 이치를 생각해본다. 노인은 지금도 십자가를 메고 어둠의 미로 같은 지하철역을 돌고 계실까. 아니면 저 하늘꽃밭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며 웃고 계시진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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