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읽다 / 김청산
발에 날개를 단 것처럼 걸음이 빠른 사람들을 쫓아가다가 그들이 남긴 족흔(足痕)을 놓쳐버렸다. 성판악을 훨씬 더 지나 작은 표고버섯들이 듬성듬성 돋은 졸참나무 통나무들이 즐비하게 어깨를 겯고 있는 초기왓(표고버섯 재배지) 근처에서 백록담 가는 길을 잃었다. 가는 곳마다 길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들이 가야할 길은 묘연해지고 말았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되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갈 길을 절반의 반도 가지 못한 채 주저앉고 말았다. 첫 산행을 너무 쉽게 생각해서 준비를 소홀히 했던 게 아닌가 싶다. 동행한 친구 K도 사뭇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우리를 다그쳐 움츠러들게 했던 겨울이 지나 어느새 찬란한 봄의 한 가운데에 들어섰다. 겨울이 냉혹하게 키워낸 꽃들이지만 화려한 빛의 향연은 무르익고 있다. 귤꽃 향이 진하게 우러나는 싱그러운 꽃 이야기가 멀리까지 퍼지는 찬란한 봄, 4월의 어느 날이다. 사랑의 열기가 식어버린 듯 고지의 봄볕은 차가운 대기 속을 겨우 뚫고 나와 이 거대한 산자락에 대책 없이 기대어 있는 우리들의 이마에 실낱같은 볕뉘 한 줌 뿌려 주곤 구름 속으로 잠겨 버린다. 그래도 구름 낀 볕뉘 한 줌도 귀한 벗처럼 위로가 될 때가 있다. 길을 찾느라 네댓 시간을 두려운 ‘헛길’만 걸었으니 온몸이 물에 젖은 솜덩이다. 이대로 한라산자락에 누워 산의 냄새를 맡으며 더 쉬고 싶었지만 갈 길이 워낙 많이 남아있어 일어나 다시 걸었다.
땅거미가 우리 뒤를 따라 거슬러 오르며 골짜기를 덮는다. 초저녁이 지나서야 용진각 대피소에 도착했다. 하늘과 계곡의 약속인가, 깊은 적막 속에 우리를 가두어 잠겨 들게 한다. 아청빛 초저녁 밤하늘에 계곡에서 휴식을 얻으려는 길눈 어두운 자(者)를 지켜주려는 듯 별 서넛이 나와 총총 숨을 쉬며 빛을 보낸다. 있는 듯 없는 듯 부는 느낌뿐인 바람소리, 계곡의 바위틈을 가늘고 잔잔하게 흐르는 물소리, 상록수 잎새 스치는 소리가 산행에 주눅이 든 우리의 마음을 평온하게 안정시켜준다. 삼베 보자기에 싸온 찐 고구마로 늦은 저녁 요기를 했다. 자연이 들려주는 백색 소음 속에 안온하게 묻혀 곧바로 잠 속에 들 수 있었다.
용진각의 새벽바람은 소리 없이 흐른다. 지난 계절의 혹독했던 결빙의 침묵이 묻어있는 듯 계곡의 공기들은 무척 무겁다. 깊은 계곡에는 어떤 알 수 없는 숭고하고 오랜 세월의 정적이 켜켜이 쌓여 있는 듯하다. 계곡을 에워싸고 있는 암벽도 상록수도 모두 조용하다. 온 천지가 적연부동(寂然不動)이다. 자연은 모든 진리를 자신 안에 간직한 채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지만 우리는 이를 잘 알아듣지도 읽지도 못하는 치인(癡人)일 뿐…. 용진각의 새벽은 계곡과 하늘 모두 푸른 기운 속에 잠겨 있다. 어머니께서 일어나 부엌일을 갈무리하고 밭일을 나가시는 푸른 새벽 시간이다. 어머니 시간에 잠이 깨었다.
여명이 일기 전에 산정을 향해 걸었다. 일찍 잠이 깬 노루 두어 마리가 우리의 갈 길을 안내라도 하려는 듯이 앞을 가로질러 재빠르게 지나간다. 산행을 도와주려는가, 오늘따라 하늘은 맑고 푸르게 열려 아득하게 깊다. 백록담으로 가는 길은 사람과 노루들이 남겨 놓은 발자국이 있어 쉽게 찾아 읽을 수 있었다. 사람과 짐승들이 다니며 발로 다져 놓은 이 산 속 좁은 숲길이 저 아래 소음 넘치는 잿빛 도시의 길보다 힘은 들어도 더 아름답고 값진 길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풍우에 시달려 낮게 아래로 뻗어 고개를 내린 상록수 나뭇가지 밑을 오리처럼 걸었다. 군데군데 큰 키의 고사목들이 보인다. 구상나무와 주목이 군락을 이뤄 자생한다는 해발 1500여 미터 부근 어느 지점인 듯하다. 사람들이 짓궂게 굴지 않고 숨겨 놓은 이 녹색 정원은 자연의 종합 예술인 듯 아름답다. 삿된 모든 것을 정화시켜줄 것 같은 거짓 없는 초록빛 풍경 속으로 계속 들어갔다. 보이는 건 상록수뿐 눈감고 들리는 소리, 진실한 산(山)의 소리만 아늑하다. 한참을 미로 같은 숲속을 낮은 자세로 걷고 또 걸었다. 산꼭대기 화산지대의 암벽에서 자란다는 암매(돌매화나무)가 보인다. 낮은 기온과 비바람에 견디기 위해 줄기는 2cm도 채 되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무, 상록활엽관목이다. 북벽의 첫 부분인가, 우람한 암벽들이 우리의 가는 길과 시야를 떡 막는다. 서너 키 높이가 더 되는 암벽을 조심스럽게 기어서 오르고 또 그렇게 다시 올랐다. 밀어주고 당겨주고 그래서 산에는 항상 진한 우정이 있는가보다. 얼마 후 굵은 주름투성이의 정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시뻘건 마그마가 힘차게 솟구쳐 흘러내렸던 분화구의 거대한 외륜(外輪)이 눈앞에 다가선다. 실로 섭리의 걸작이다. 저 아래 북쪽 멀리 갯마을 복덕개*에서 이십여 년의 세월을 올려다보기만 했던 상상 속의 한라산. 서로 일으켜주며 천신만고 끝에 그 정상에 드디어 올라섰다.
동쪽으로 트인 조그마한 반창(半窓)이 하나 있는 한 평 반쯤 되는 방에 들앉은 지 1년이 되고 있을 무렵이다. 탯줄을 잘라 어머니의 생명에서 독립된 태실(胎室)을 시작으로 여태까지 다섯 번째 옮겨 살고 있는 방이다. 반창이 아니면 빛이 들어 올 길이 없는 작은 방, 게다가 돌담으로 시야가 가려져 시나브로 바뀌는 계절의 빛을 감지할 수 없는 그런 방에 K가 찾아왔다. 국민 학교와 중학교를 같이 다니고 일본에서 고교를 졸업한 K가 오래간만에 귀국하여 아무도 찾지 않는 내 방에 불쑥 나타난 것이다. 무척 반가웠다. 군 복무를 마치고 실타래처럼 헝클어진 내면의 길의 가닥을 찾아 읽지 못한 채 노심초사하고 있을 때였다. 삶에 있어 모든 것은 길이라고 하지만 그때 나는 미궁 속에 널브러져 있었다. K도 비슷한 처지였던 모양이다. K의 제안으로 집에서 멀리 그리고 반복되는 일상에서 멀리 떨어져 한라산의 높고 겸허한 경외의 푸른 자연 속에 들어가기로 했다. ‘두려움 없는 나이이기에 예술의 산에 도전’(A. 포우프 / 알프스 넘어 또 알프스)하기로 한 것이다. K가 아니었으면 이 산행은 생각조차 못 했을 게다.
얼마 전에 봄비가 많이 오더니 백록담엔 물이 그득하다. 호수 가까이에서 깊고 길게 숨을 쉬었다. 어제 오늘 쌓인 피로가 날숨으로 다 사라져 버린 듯 몸이 잘 마른 솜처럼 가볍다. K도 호숫가에서 숨을 쉬느라 열심히 하늘을 두 팔로 받쳐 들고 서 있다. 산정의 공기 맛이 쌈박하다. 싱그럽다. 상큼하다. 가슴 속을 파고드는 들숨이 차갑다. 길게 내뱉는 날숨이 시원하다. 불가사의한 이 우주 안에 생명을 갖고 태어난 것은 정말 행운이자 기적이며 한없이 신비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을 뜬금없이 해본다. 들숨은 ‘생명’을 이어 주고, 날숨은 ‘영혼’을 정화시켜 준다는 말을 떠올리며 의식적인 숨쉬기를 계속했다. 우주의 호흡에 보조를 맞추기라도 하듯이 한참동안 숨쉬기를 했다. 들숨, 날숨, …생명, 영혼, … 이렇게 이어지는 우리의 숨 쉬기는 우주적 삶의 한 작용으로 생명의 끝까지 이어지리라.
백록담은 또 하나의 거대한 우주를 갖고 있었다. 하늘과 호수의 조응(照應)인 듯 자신의 중심에 새로운 하늘을 산뜻하게 만들어 새파란 광장을 호수에 띄워 놓고 있다. 잘 여물어 큼직한 뭉게구름 두어 덩이가 호수 위를 느릿느릿 지나간다. 뒤이어 흰 구름 한 조각, 가난한 어부의 나룻배처럼 천천히 지나간다. 수면 위를 지나는 하얀 나룻배를 바라본다. 하늘과 땅 사이에 서있는 자신을 들여다본다. 삶의 길을 제대로 읽지 못한 채 미궁 속을 헤매었던 그 많은 회한의 시간들이 호수 위에 담뿍 햇볕을 안은 구름 배처럼 지나간다. 하찮은 무게의 영혼이 백록담 호수에 깨끗이 씻겨진 듯 머리와 가슴이 텅 빈 듯 무상(無想)하다. 산행의 피로와 낯선 숲 속을 헤매던 두려움도 모두 소멸되는 것 같다. 고요한 호수의 물이 나를 흔들어 잠들게 하려는지, 호숫가에서 깊은 잠에 빠져 들고 싶은 평온함이 갑자기 휩싸여 온다. 하늘 가까이에 있는 이 백록담이 나에게 어머니의 포근한 품을 되돌려준 듯하다.
‘얼마나 많은 길을 읽고 걸어야봐야 진정한 인생을 깨닫게 될까.’
처음 걷는 서귀포 쪽 하산길이다. 시간 여 걸어 내려가다 어제처럼 다시 길을 잘못 들어 헤매었다. 길에 감금되어버렸다. 사람들은 항상 길에 갇혀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 듯하다. 주변의 길을 찾기 위해 같은 지점으로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다가 예정 시간을 훨씬 넘겨서 서귀포에 도착했다. 우리들의 삶도 이 산행처럼 힘든 여정일 게다.
발과 다리가 몹시 아프다. 아파야 내 몸을 지탱해주는 발과 다리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지도 모른다. 삶이 아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귀가하면 ‘삶이 아픔의 축제’라 생각하고, 어차피 아픔을 껴안고 아픔 속으로 과감하게 들어가야 될 일이다. 다섯 번째 방에서 탈출하여 여섯 번째 방에서 아픔 속의 ‘참길’을 찾아 읽어야 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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