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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잊었거나 잊혔거나 / 윤성근

잊었거나 잊혔거나 / 윤성근

 

 

 

내 책상에는 탁상용 일력이 두 개 있다. 하나는 금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작년 판이다. 해가 바뀌면 쓸모없는 것이 달력이지만, 나는 지난해 것도 올해 것 못지않게 소중히 여긴다. 날짜를 보는 것 외에 또 다른 쓰임새가 있어서이다. 지난해 초, 친구에게서 탁상일력을 하나 얻어 왔다. 성바오로의딸수도회에서 펴낸 탁상용 말씀 달력이었다. 낱장을 넘길 때마다 반겨주는 간결한 수채화가 인상적이었지만, 그보다는 그림과 함께 실려 있는 짧은 글귀가 더 눈길을 끌었다.

글귀는 성경말씀이었다. 성경이야 가끔 대하는 것이니 새로울 게 없지만, 관심의 대상은 나란히 적혀있는 영문구절이었다. 별 생각 없이 한두 구절씩 보고 익히기 시작했다. 심심풀이로 시작한 일이었다. 더러는 내 짧은 영어로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구절이 있어 흥미로웠고, 곧바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한글성경과 비교해보면 그 뜻을 헤아리기가 어렵지 않았다. 재미있었다. 누군가가 했던 말영문성경은 오랜 세월에 걸친 개정과 개역으로 문장이 정교하게 정리되어 있어, 영어 공부를 위한 최선의 교과서이다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생각지도 않았던 일에 빠져드는 것일까? 성경을 좀 더 정확히 이해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렇다고 영어공부를 다시 해보자는 생각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호기심에 한두 구절씩 보고 익히기 시작한 것이 모르는 사이에 일과처럼 되어 오늘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딱히 정해놓은 목표가 있는 것은 아니니, 단 몇 분 만에 끝마치기도 하고 몇 시간 계속하기도 한다. 이상한 것은 이렇게 열중하고 있노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나브로 마음이 편해지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예술성 높은 스포츠경기는 본 게임이 끝난 뒤에 으레 갈라쇼로 이어진다, 선수도 관중도 모두 긴장에서 벗어나 편한 마음으로 즐기는 뒤풀이 공연이다. 갈라쇼에 임하는 선수는 경기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스타일대로 연마한 기술을 남과 다른 방법으로 펼쳐 보이니 오히려 예술성이 더 높을지도 모를 일이다. 서로 겨루던 선수도, 순위를 가리던 심판도, 마음 조리던 관중도 모두 긴장에서 벗어나 편한 마음으로 즐기니 부담스럽지 않다.

언제부터인지 갈라쇼를 닮은 넉넉함이 좋아졌다. 나이 들어 일을 내려놓으면서 생각이 조금씩 단조로워져갔다. 이제 무엇인가를 목표로 누구와 겨루는 일은 가능하면 피하고 싶다. 그러려니 자연스럽게 밖으로 내뻗기보다는 안으로 잦아들기에 익숙해진다. 나에게 성경 익히기란 내 스스로가 자신을 위해 연출하는 갈라쇼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보니 요즈음 일상 중에 겪고 있는 크고 작은 일들이 모두 갈라쇼를 닮은 것 같다. 운동을 한답시고 헬스클럽도 찾고, 틈틈이 책도 읽고, 친구를 만나기도 하지만 모두 뚜렷한 목표 없이 가볍게 즐기는 놀이 수준에 머물고 있으니 말이다.

운동만 해도 그렇다. 처음 헬스클럽을 찾아가 운동을 시작할 때는 확실한 목표가 있었다. 수술한 허리의 빠른 재활을 위함이었다. 그로부터 수개월 후, 허리를 웬만큼 쓸 수 있게 되고 난 뒤에는 목표가 몸만들기로 바뀌어 이어갔다. 한때 제법 틀 잡힌 근육질 몸매를 자랑하기도 했으니 목표달성을 위한 노력의 결과였다. 아직도 운동은 계속하고 있다. 근 이십여 년을 바라보는 세월이다. 하지만 이제는 설렁설렁 유산소운동이나 하며 시간을 보낸다. 목표달성을 위한 절실함은 사라진 때문이다. 책읽기도, 친구만나기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가끔 책을 펴들긴 하지만 내용에 빠져들기보다는 책장 넘기기나 즐기고, 친구와 만나도 진지한 대화 대신 허튼소리나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낸다. 모든 것이 설렁설렁이지만, 그래도 아직 이렇게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으니 궤도이탈은 아니라며 스스로 만족한다. 자위일 것이다.

한때 숲을 즐겨 찾던 때가 있었다. 오랫동안 묶여 있던 관계의 성()에서 벗어나 홀로서기를 익힐 때였다. 이름이 알려진 곳보다는 찾는 사람 없는 조용한 곳이 대상이었다. 힘들여 찾아가서는, 크고 작은 푸나무들과 마음을 나누며 서성거리다 돌아오는 것이 전부였으니 싱거운 여행이었다. 그래도 그때, 혼자 즐기는 여유를 배운 것 같으니 고마운 일이다. 숲을 이루고 있는 식물들은 한자리에 붙박이로 서서 일생을 보내면서도 그들이 지키는 생활 질서는 일사분란하다. 키 큰 나무(喬木層) 아래 키 작은 나무(亞喬木層), 그 밑에 떨기나무(灌木層), 보다 더 낮은 자리를 지키는 풀(草本層)과 땅바닥에 붙어사는 이끼(地衣類). 이들은 모두 햇빛과 공기와 생활공간까지도 무리 없이 나누어 가지며 정해진 질서의 틀 속에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살아간다. 생각 없는 푸나무들이 조직적으로 생태계(生態系)를 유지하는 비법은 어디에서 배운 것일까?

숲속의 나무처럼 푼수에 맞게 살기가 어찌 그리 쉬운 일일까만, 주어지 여건 속에서 무리 없이 살려고 애를 쓴다. 돌아보면 오랫동안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 섞여 살면서 튀어 오르려고 애를 썼다. 그것이 사는 재미였다. 이제는 뒤돌아보는 여유를 즐긴다. 그동안 얻은 것도, 잃은 것도 많았다. 얻을 때는 얻은 대로, 잃을 때도 잃은 대로 힘들기도 절박하기도 했지만 마주했던 상황을 즐겼던 것 같다. 이제는 무엇을 꼭 이루어야겠다는 욕심은 없다, 그러니 설렘도 없고, 급할 것도, 긴장할 것도 없다. 감당하기 힘들었던 문제들도, 그로 인해 겪었던 희열도 좌절도 이제 모두 낯선 감정이 되었다. 스스로 잊었거나 잊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막을 내린 것은 아닐 터이다. 아직 편한 마음으로 펼쳐 볼 갈라쇼가 남아 있으니 상황에 맞추어 이를 즐겨야 할 일이다. 큰 연주를 마치고 난 기타리스트와 이제 막 기타의 기본코드 익히기를 끝낸 아마추어가 느끼는 행복감이 다르지 않다고 한다. 손에 잡히는 만큼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것도 고마운 일이다.

나른한 오후, 긴장이 풀리면서 몸도 마음도 함께 느슨해진다. 이럴 때는 툭툭 털고 일어나 헬스클럽에서 땀 흘리는 것이 제일 좋은 해결책이다. 운동 가방을 꾸려들고 집을 나선다. 아파트 단지의 작은 산보 길에서 유모차를 밀고 나온 젊은 부부와 마주친다. 유모차에는 생각보다 훨씬 어린 갓난아기가 타고 있다. 어쩌면 오늘이 이 아기가 처음 세상나들이를 나온 날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아기가 처음 만나는 이웃사촌? 아기 뺨이라도 만져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유모차 모서리를 슬쩍 건드리는 것으로 아기와의 첫 인사를 대신한다. 아기엄마가 가볍게 미소를 보낸다. 초가을 햇볕이 부드럽고, 건듯 불어오는 실바람이 상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