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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선빈이 / 권오훈

선빈이 / 권오훈

 

 

 

출근길 승강기가 9층에서 멈추었다. 조그만 여자애가 엄마 손에 매달려 승강기에 탔다. 커다란 눈에 속눈썹이 길게 위로 솟고 얼굴은 자그마해 바비인형을 연상시켰다.

참 예쁘게 생겼구나. 이름이 뭐니?”

아이는 꽈배기처럼 꼬며 엄마 뒤로 돌아가더니 눈만 빼꼼 내밀었다.

아저씨가 물으시잖아. 대답해야지

……

나이는 몇 살?”

……

우리 애가 부끄럼이 많아요.”

엄마가 대신 변명해 주었다. 아이는 엄마 손을 잡고 셔틀버스가 기다리는 정문 쪽으로 가며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다음번에 마주쳤을 때 안녕하고 인사하며 또 물었다. 외면하며 이름도 나이도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이럴 때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십중팔구 골난 목소리로 쏘아붙일 것이다.

대답을 안 하니 아저씨가 맞춰볼까. 네 이름 개똥이지. 맞지?”

아니에요. 선빈이에요

, 선빈이구나. 얼굴처럼 이름도 이쁘네.”

……

만날 때마다 나만 일방적으로 인사를 하고 아이는 꿀 먹은 벙어리 같이 굴었다. 볼 때마다 예쁘고 귀엽게 생겼다고 아이엄마에게 말했다. 여자에게 예쁘다는 인사는 노소를 막론하고 벽을 허무나보았다. 숨지는 않았다. 여전히 딴전은 피웠다.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겨우 고개만 까딱했다.

나는 아파트의 우리 라인 30세대 모든 주민과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다. 승강기를 타고 오르내리는 시간은 길어야 30여 초다. 눈인사만 하고 외면한 채 가기에 내게는 그 시간이 길다. 날씨 얘기로라도 공통 화제를 만들어 대화를 나누려 애쓴다. 나이든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 아이들이 많지 않다. 어린이집 다니는 선빈이가 가장 어리고 두 명의 초등생과 네댓 명의 중고등학생이 있을 뿐이다. 나는 그 애들과도 알고 지낸다. 아내는 시의원에 출마할 거냐며 실없이 말을 걸지 말라고 성화다. 어린 여자애에게는 아동성범죄에 해당될 수도 있다며 극구 말린다.

나는 직장이 바뀌면서 출퇴근 시간이 달라졌다. 선빈이와는 시간이 맞지 않아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다. 수개월 동안이나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엊그제는 집안 일로 일찍 퇴근했다. 주차하고 걸어가는데 뒤에서 차 소리가 들려서 지나가기 쉽게 옆으로 비켜섰다. 차가 내 옆에 멈춰 섰다. 차창이 열리더니 여자아이 얼굴 하나가 쏙 나왔다.

아저씨!”

선빈이었다. 이름을 물어도, 나이를 물어도 대답을 않던 그 애가 나를 불렀다. 얼굴에도 목소리에도 반가움이 깨엿처럼 묻어 있었다. 함께 승강기를 탔다. 선빈이는 9자 버튼을 누르더니 어떻게 알았는지 내쳐 12자 버튼까지 누르고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