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빈이 / 권오훈
출근길 승강기가 9층에서 멈추었다. 조그만 여자애가 엄마 손에 매달려 승강기에 탔다. 커다란 눈에 속눈썹이 길게 위로 솟고 얼굴은 자그마해 바비인형을 연상시켰다.
“참 예쁘게 생겼구나. 이름이 뭐니?”
아이는 꽈배기처럼 꼬며 엄마 뒤로 돌아가더니 눈만 빼꼼 내밀었다.
“아저씨가 물으시잖아. 대답해야지”
“……”
“나이는 몇 살?”
“……”
“우리 애가 부끄럼이 많아요.”
엄마가 대신 변명해 주었다. 아이는 엄마 손을 잡고 셔틀버스가 기다리는 정문 쪽으로 가며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다음번에 마주쳤을 때 ‘안녕’ 하고 인사하며 또 물었다. 외면하며 이름도 나이도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이럴 때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십중팔구 골난 목소리로 쏘아붙일 것이다.
“대답을 안 하니 아저씨가 맞춰볼까. 네 이름 개똥이지. 맞지?”
“아니에요. 선빈이에요”
“아, 선빈이구나. 얼굴처럼 이름도 이쁘네.”
“……”
만날 때마다 나만 일방적으로 인사를 하고 아이는 꿀 먹은 벙어리 같이 굴었다. 볼 때마다 예쁘고 귀엽게 생겼다고 아이엄마에게 말했다. 여자에게 예쁘다는 인사는 노소를 막론하고 벽을 허무나보았다. 숨지는 않았다. 여전히 딴전은 피웠다.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겨우 고개만 까딱했다.
나는 아파트의 우리 라인 30세대 모든 주민과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다. 승강기를 타고 오르내리는 시간은 길어야 30여 초다. 눈인사만 하고 외면한 채 가기에 내게는 그 시간이 길다. 날씨 얘기로라도 공통 화제를 만들어 대화를 나누려 애쓴다. 나이든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 아이들이 많지 않다. 어린이집 다니는 선빈이가 가장 어리고 두 명의 초등생과 네댓 명의 중고등학생이 있을 뿐이다. 나는 그 애들과도 알고 지낸다. 아내는 시의원에 출마할 거냐며 실없이 말을 걸지 말라고 성화다. 어린 여자애에게는 아동성범죄에 해당될 수도 있다며 극구 말린다.
나는 직장이 바뀌면서 출퇴근 시간이 달라졌다. 선빈이와는 시간이 맞지 않아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다. 수개월 동안이나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엊그제는 집안 일로 일찍 퇴근했다. 주차하고 걸어가는데 뒤에서 차 소리가 들려서 지나가기 쉽게 옆으로 비켜섰다. 차가 내 옆에 멈춰 섰다. 차창이 열리더니 여자아이 얼굴 하나가 쏙 나왔다.
“아저씨!”
선빈이었다. 이름을 물어도, 나이를 물어도 대답을 않던 그 애가 나를 불렀다. 얼굴에도 목소리에도 반가움이 깨엿처럼 묻어 있었다. 함께 승강기를 탔다. 선빈이는 9자 버튼을 누르더니 어떻게 알았는지 내쳐 12자 버튼까지 누르고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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