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내기 / 박문하
낭만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그것이 가정 밖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그것은 우리네 가정이나 부부생활 속에서도 얼마든지 찾아 낼 수가 있는 것이다.
천하에 제일가는 사위를 구하기 위하여 해와 구름과 바람을 찾아서 밖으로만 헤매었던 두더지가 그것을 끝내 찾지 못하고 지쳐서 제 집에 돌아 왔을 때 의외에도 해와 구름과 바람보다 더한 행복이 제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우화처럼 낭만의 주소도 연륜과 더불어 차차 그 방향이 제 집과 아내에게로 되돌아가는 모양이다.
숨 막히는 무더운 여름밤에 나는 이따금씩 아내를 동반하고 바닷가로 나간다. 그것이 으스름달밤이면 더욱 좋다. 넓은 바다 위에 소녀처럼 수줍은 달빛이 비치면 40대의 아내도 한결 낭만에 젖는다. 장터처럼 복작이던 해수욕장도 밤이 되면 몇 쌍의 아베크들만 남아서 달빛아래 사랑을 속삭일 뿐이다. 나는 이곳에서 바다의 생리를 배운다. 파도의 손질은 몇 만 년 동안 바위를 애무해도 늙지 않는다. 이래서 우리 부부도 기분이 나면 바닷가 조용한 여관을 찾아서 하룻밤 사랑의 신방을 꾸며보기도 하는 것이다.
밤 열두 시가 지나서 여관 방문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서 잠을 깼다. 토요일 밤 풍기 단속을 나왔다는 경찰관들이다. 그러나 겁날 것은 조금도 없다. 나는 누운 채로 그들을 맞는다.
“부부 동반입니다.”
“그러지 마시고 솔직히 말씀 하시지요.”
“그럼 연인끼리라고 할까요.?”
“그것이 사고죠. 요즘 연인들이란 유부녀가 태반이니 깐요.”
“그 유부녀의 남편이 바로 나 자신일 때는 괜찮지 않소.”
“농담은 마시고 우리는 지금 장난을 하러 온 것이 아니고 공무를 집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미안하지만 파출소까지 가시지요.”
“천만의 말씀, 가정의 날에 표창을 받지는 못할망정 풍기 단속에 걸리다니 당치도 않은 말씀이오.”
“그럼 선생님 댁에 전화를 걸어 보아도 좋습니까?”
이것 협박조다. 잠깐 내 얼굴에 당혹이 아닌 장난기가 스친다.
“한 가지 조건이 있소. 전화를 걸어서 만일에 우리가 부부인 경우에는 어떠한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으나 반대로 우리가 부부인 것이 확인될 때는 당신들이 맥주 한 박스를 사겠소?”
“좋소.”
사나이와 사나이의 약속이었다. 이래서 전화의 대화가 몇 번 오가고 난 뒤에, ‘아닌 밤중에 홍두깨’격으로 맥주 한 박스가 제 발로 굴러들어왔다. 억울하게 맥주 한 박스를 빼앗겼어도 사나이의 약속이라 어쩔 수 없이 함께 얼근히 취한 형사들이 자리를 뜨면서 한다는 말이 “선생님은 악질이야!” 나는 그 악질이란 말이 밉지 않아서 그 다음날 그들을 비어홀로 불내어서 톡톡히 한 턱을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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