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신 / 노경애
아침에 눈을 뜨면 이층집 창문을 바라보며 하루일과를 시작했었다. 그러면 어김없이 새댁은 음악을 틀어놓고 잠옷을 입은 채 부스스한 얼굴로 창문을 열고 우리 집을 향해 이불을 털어댔었다. 방망이로 툭툭 이불을 털 때마다 먼지가 죄다 우리 집으로 날아와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하루는 새댁에게 간곡히 부탁을 했지만 새댁은 코대답도 하지 않고 여전히 먼지를 털었다. 이젠 창문 여닫는 소리만 들어도 부아가 치밀어 올라 먼지를 터는 새댁을 향해 우리 집으로 복을 다 털어내라며 매일같이 궁시렁거렸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새댁이 더 이상 옷가지며 이불을 털지 않았다. 음악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팔자 좋은 부잣집 며느리니 지난번처럼 외국으로 여행을 갔는지 아니면 아침저녁으로 내뱉는 내 주문이 먹혀 들어갔는지 궁금했다.
하루는 시어머니인 장바우댁을 찾아가 차 한 잔을 나누며 넌지시 물어보았다. 뜻밖에도 새댁이 갓 돌 지난 아이를 두고 집 나 간지 달포가 넘었다고 한다. 잦은 남편과의 다툼으로 걸핏하면 집을 뛰쳐나가버리는 통에 장바우댁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이번에는 패물과 통장까지 다 챙겨가 아무래도 이혼까지 할 것 같다며 아이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리쉰다. 시부모 잘 만난 덕에 좋은 차 몰며 부족함 없이 잘 살아 가던 새댁이 무엇 때문에 보금자리를 박차고 떠나 버린 걸까.
원두커피향이 구수하게 풍겨오는 역전 뒷골목으로 접어들면 화장품 가게가 있었다. 화장품 가게를 하는 지영씨는 유리창에 붙은 광고 전단지의 모델만큼이나 아름다운 여자였다. 훤칠한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보기 드문 미인인데 반해 남편은 막노동을 한 사람처럼 피부가 검고 한쪽 다리까지 절뚝거려 아무리 봐도 짝이 기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골목상가 사람들에게는 소문이 날 정도로 부부금슬이 남달랐고, 마음씨 또한 유순한 사람들이라 나는 오래도록 화장품 가게를 단골로 드나들었다.
평소 소심하고 귀가 얇은 나는 그곳을 찾기 전에는 남들이 좋다는 화장품마다 솔깃해져 닥치는 대로 화장품을 구입을 하곤 했다. 한번은 비싼 가격으로 산 화장품이 얼굴에 맞지 않아 뾰루지가 생겨 오랫동안 고생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영씨는 꼼꼼히 내 피부를 관리 해주고 컴퓨터에 입력해 놓았다가 내게 맞는 화장품을 권하곤 했다. 화장품뿐만 아니라 여자들의 필수품인 속옷이나 액세서리 같은 장신구도 손님이 찾으면 주문을 받아놓았다가 서울 동대문시장으로 물건을 떼러가곤 했다. 이곳저곳 큰 시장을 돌아다니며 발품을 팔아 어렵사리 사온 물건을 단골에게는 이문을 남기지 않고 줄때가 더 많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녀의 손목에는 늘 일회용 반창고를 붙여 놓았다. 처음에는 음식을 만들다 불에 덴 상처인가 싶어 무심코 지나쳤는데 시도 때도 없이 손목 한 부분을 매일같이 가리고 있었다. 반창고뿐만 아니라 손수건을 동여매기도 했고, 꽃 모양을 오린 파스를 붙이기도 했는데 늘 볼 때마다 무슨 사연이 있을 것만 같았다.
하루는 손님이 없는 한가한 틈을 타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는 지영씨의 손목에 눈길을 두며물어보았다. 지영씨는 엷은 미소를 뛸 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얼굴은 잘 익은 복숭앗빛 홍조를 띄고 있어 당황해 하는 얼굴빛 분명했다. 남들에게 보이지 못할 흉측한 상처라도 있는 걸까, 어물거리며 대답을 피하는 지영씨의 모습에 아픈 생채기를 건드린 것 같아 기분이 찜찜했지만 여전히 궁금함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아스팔트를 달구는 무더운 여름이었다. 서너 평 남짓 되는 좁은 화장품가게 안은 선풍기가 탈탈거리며 힘없이 더운 바람을 쏟아냈고, 진열장에 올려놓은 구릿빛 얼굴의 못난이 삼형제도 숨이 막히는지 종일 찌푸린 얼굴이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지나가는 행인을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동안 지영씨가 화장품 샘플을 많이 챙겨주었고, 얼굴 맛사지도 공짜로 여러 번 해 주고해서 팥빙수를 두 그릇 사왔다. 지영씨는 “제가 사 드려야 하는데...” 말꼬리를 감추며 팥빙수를 받아들었다. 그런데 손목에 붙여놓은 반찬고가 땀에 밀려 달랑거렸다. 순간 내 눈길은 지영씨의 손목에 예리하게 꽂혔다. 박속같이 흰 가느다란 손목은 흉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뜻밖에도 하트모양의 화살이 꼽힌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요즘 젊은 사람도 아닌 불혹을 넘긴 사람인지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황혼에서 새벽까지’에 출연했던 조지 클루니의 팔뚝에 새긴 문신도, 친구와 의형제를 맺느라 어머니의 가슴팍에 새긴 콩알만 한 먹 점을 보아도 별다른 감정이 없었던 내가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평소 품었던 지영씨의 고고한 인품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다부진 체격에 매섭게 생긴 지영씨의 남편이 과거에 조폭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고 그 부부의 과잉 친절도 의심스러웠다. 그 이후로 나는 오래도록 그 화장품 가게를 드나들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 와서 이혼을 밥 먹듯 하는 젊은이들을 보며 청춘의 비밀이 새 나갈까봐 꼭꼭 싸매놓은 지영씨의 팔목에 새긴 문신이 보물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어스름 저녁이 되자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적막을 가른다. 대문간에는 엄마를 찾는 아이의 탁탁 갈라지는 울음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온다. 손녀를 달래느라 장바우댁은 오늘도 한숨을 쉬며 하얗게 부서지는 달빛아래 창백한 얼굴로 대문간을 서성이고 있는가 보다. 나는 어쩌다 장바우댁의 등에 업힌 아이의 눈물고인 까만 눈동자를 볼라치면 새댁을 향한 무수히 쏟아놓은 내 푸념들이 맞아 떨어진 것만 같아 눈을 돌린다. 그리고는 지난번처럼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새댁이 창문을 열고 이불을 털지 않을까 자꾸만 이층집을 올려다본다.
지금쯤 어느 하늘아래 살고 있는지 새댁 가슴에 문신처럼 새긴 아이의 까만 눈동자를 떠 올리며 퉁퉁 부런 젖가슴을 어루만지며 가슴 아파 하고 있지 않을까, 부부간의 일은 아무도 모른다고 하지만 나는 섣부른 결정으로 매몰차게 떠나버린 새댁을 향한 원망의 푸념을 날리며 내 가슴에 삶의 먹 점하나를 또 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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