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이 있는 풍경 / 고임순
가을이 오면 일상을 벗어나 어디론지 떠나고 싶다. 떠남으로써 만나는 새로움에 접하고 싶은 것이다. 떠남이 없이는 새로운 만남이 없기 때문이다. 이 새로움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고 수필 한 편 쓰고 싶을 때 찾아가는 곳이 있다.
서울 도심을 벗어나 청량리에서 청평으로 가는 46번 국도를 달리면 숨통이 트인다. 마치 터널을 벗어나 만남의 광장 휴게소가 보이면 집을 떠났다는 실감으로 설레게 된다. 차창을 열고 시원한 바람을 마시며 조금 더 가면 오른편으로 아늑한 쉼터가 나온다. 천혜의 자연에 감싸인 별천지 모란미술관.
10년 전에 문을 열어 화제가 되었던 이곳은 8,500여 평에 달하는 방대한 야외 전시 공간을 자랑하고 있다. 4개의 상설 전시장에는 국내의 유명 조각가들의 작품이 자연과 더불어 숨쉬고 있어 관람객을 사로잡는다. 입구를 들어서면 우선 뒹굴고 싶은 넓은 잔디밭이 시원하게 트이고, 미술관의 이색적인 뾰족 지붕이 눈길을 끈다. 오른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한적한 별장 같은 통나무 카페가 운치를 더해 주며, 눈에 들어오는 갖가지 조형물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하늘 아래 탁 트인 자연 속에 자리하고 있기에 모두 아름다운 조형물들. 전문가가 아니어서 작가의 이름이나 작품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느낌으로 감상하면 분위기가 저절로 설명해 준다. 어디서 들려오는 클래식 음악 소리가 예술작품들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일까. 바라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산과 흰구름 뜬 하늘과 나무들은 한데 어울려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려주고, 그 속에서 어느덧 조각들과 대화를 나누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구리시(九里市)에 뿌리내린 풍양 수필문학회에서는 계절마다 이곳을 찾아 수필 공부를 한다. 시멘트 벽으로 막힌 공간에서보다도 단 하루의 야외 수업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모른다. 이곳에 포근히 잠기고 있으면 자연히 수상이 떠오르고 한편의 글을 쓰고 싶은 의욕이 솟아난다. 눈이 뜨이고 귀가 열리는 시간이다. 사람은 듣는 귀 이상의 존재가 아닌가. 볼 수 있는 눈이 기도하고 느낄 수 있는 신경중추이기도 한 것이다.
미술관 뒷뜰, 꿈길 같은 연못가를 지나서 은행나무 그늘을 찾아 회원들은 돗자리를 깔고 앉는다. 원고지를 펴서 펜을 들고 각자의 마음 속에 담겨진 풍경을 그리기 시작한다. 성격과 삶이 다르듯이 각자의 독특한 무늬로 자기를 드러내고 있다. 바람따라 우수수 떨어지는 샛노란 은행잎 비를 맞으며 삶의 체험을 엮어가는 모습들이 진지하다. 일상생활에서 쌓인 삶의 찌꺼기, 그 무엇으로도 치유될 수 없었던 가슴앓이의 응어리를 맑은 대기 속에 풀어 헹구어내면서.
문학은 곧 삶이다. 한편의 수필 쓰기는 고뇌의 분출이고 자기 성찰의 인간학이다. 살아온 만큼의 아픔이 낙엽처럼 쌓인 세월을 헤집고 들어가 모두들 가슴 속으로 울면서 글을 쓴다. 그들은 오늘 집을 떠나옴으로 해서 얼마만큼 새로운 삶의 의미를 발견했을까. 그 새로움을 ‘나의 이야기’ 속에 담으려고 여념이 없는 모습들이 살아 있는 조각품같이 아름답다. 그들의 오늘의 결실은 내일을 여는 활력소로서 뜻깊은 의미를 지닐 것이다.
나는 오늘 수필을 가르치는 기쁨이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오랫동안 강단에서 문학 강의를 하면서 회의에 빠졌던 의문을 푼 것이다. 한 작품을 쓰기 위해서 발상에서 비롯하여 주제와 소재를 정하고 서두를 쓰기 시작한다. 다음 구성과 문장 표현에 유의하여 마무리를 하고 제목을 붙인다. 그리고 여러 번 퇴고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렇게 지금까지 떠들어 대던 수필 창작기법의 이론이 이곳에서는 소리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오늘 회원들의 수필 쓰기를 거들어 준 것은 내가 아니었다. 집을 떠났다는 어떤 해방감과 함께 쓰고 싶은 의욕을 이곳 분위기가 부추겨 주었기 때문이다.
교학상장(敎學相長). 내가 회원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음을 깨닫는다. 누구에게나 말하고 싶고 쓰고 싶은 나만의 이야기가 있다. 수필 쓰기는 자기 삶의 우물파기이다. 계속 파들어가면 생수 같은 이야기들이 솟아난다. 그래서 꾸준히 습작하는 길만이 수필 쓰기의 지름길인 것이다.
가을 햇살이 은은히 퍼져 있는 미술관 뜨락, 회원들의 삶이 향기가 어리는 수필이 있는 풍경이 너무나 정겹고 아름답다.
돌아가는 길, 본관 실내 전시장에 들러 상설 전시된 작품들을 관람했다. 남태평양 적도 부근의 섬나라의 유물들이 특이했다. 그리고 회화 조각 등 유명인의 소장 작품을 감상하면서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켰다.
뿌듯한 마음으로 산책로를 따라 여유롭게 걸어나오면서 사색하며 정문 앞에 다다르니 단풍나무 몇 그루가 불을 내뿜듯 타고 있어 가슴이 뜨거워진다. 내 가슴에 그 불씨를 당기고 나도 타면서 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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