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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마당쇠의 봄 / 이화련

마당쇠의 봄 / 이화련

 

 

 

남편은 자칭 마당쇠다. 마당일을 많이 한다는 뜻인가 본데 얼추 맞는 말이다. 그는 적지 않은 시간을 마당에서 보낸다. 안 보인다 싶으면 마당에 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나무를 올려다보거나, 숨죽인 얼굴로 꽃눈을 세거나, 팔짱을 끼고 어슬렁거린다. 그러다 생각난 듯 물을 주고 나뭇가지를 다듬고 잔디를 깍는다. 그러면서 투덜거린다. ‘내가 숫제 마당쇠라니까!’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는 게 아무래도 나 들을라는 소리다. 스무 해가 넘도록 처자식을 벌어 먹이면서도 생색 같은 건 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손바닥만한 마당 잔디 좀 깍았다고 큰소리친다.

나는 짐짓 감탄한다. 나무 가꾸는 솜씨가 정원사 뺨치겠다고, 마당이 아주 훤하다고, 얼마쯤 진실이다. 처음 손을 댔을 땐 쥐어뜯어 좋은 것 같던 향나무가 이삼 년 사이 둥글둥글 제법 모양이 잡혔다. 동백, 철쭉, 배롱나무도 잎이 반들거리고 꽃이 탐스러워졌다. 마당쇠가 팔을 걷어붙인 덕분이다. 집안일이라고는 모르는 사람이 그렇게라도 거들어 주니 다행이다.

그런데, 그는 꽃철에만 마당쇠다. 철쭉이 필 무렵부터 연산홍이 붉은 초가을까지, 그 때까지만 마당쇠다. 장독대 옆의 흰 꽃을 시작으로 구석구석 철쭉이 피고 돌 틈의 연산홍이 포기포기 꽃불을 밝히면 그는 마당을 떠날 줄 모른다. 의자를 내다놓고 앉아 신문을 보고 차를 마신다. 마당이 좀 넓었더라면 밥상도 거기서 받겠다고 했을지 모른다.

남편을 마당쇠로 만든 건 내가 아니다. ‘미인’ ‘입술’ ‘귀부인’ ‘박꽃’ ‘필크레이디’, 이것들이 그의 마음을 붙잡고 있다. 그냥 붉은 철쭉 흰 철쭉이라 해도 되는데 이름까지 지어준 걸 보면 그 마음을 알만하다.

미인은 단풍나무 밑에 있는 분홍 철쭉이다. 위로 뻗은 가지들이 한 쪽으로 기울어,살짝 들어 앉은 듯 보인다. 한 번에 수백 송이의 꽃을 피우는데 꽃 빛이 다른 나무보다 월씬 진하다. 그가 미인, 미인하며 예뻐해서 그런지, 처음부터 진했는지 알 수 없다.

입술은 연분홍 꽃송이 가장자리에 진분홍 띠를 둘렀다. 그게 그에게는 입술연지를 바른 걸로 보인단다. 그래서 입술이다. 귀부인과 박곷, 핑크레이디는 화분에 들어있다. 이를테면 별당아씨들이다. 귀부인은 아담한 몸집에 꽃송이마다 빛깔이 조금씩 다르다. 비칠 듯 은은한 것, 진달래처럼 밝은 것, 묻어날 듯 붉은 것--. 박꽃은 이름처럼 뽀얗다. 꽃이 어찌나 큰지 서너 송이만 피어도 가지를 가 덮는다. 피크레이디는 나무가 커다란 기역자 모양으로 휘었다. 허리를 세우면 뙈 늘씬할 것이다. ‘입술’과 똑같은 꽃을 피우는데 가지마다 촘촘히 꽃을 달면 혼자 보기 아갑다. 그대로지지 말았으면 싶다.

부인이며 레이디를 챙기는 그의 정성은 지극하다. 자기 밥 때는 놓쳐도 나무들 물 때는 안 거르고, 어쩌다 시든 잎이 보이면 흉터를 지우듯 서둘러 떼어낸다. 볕이 너무 따갑네, 빗물이 해롭네, 애 태울 일도 많다. 아예 양산을 사다 씌우구려, 보다 못해 한 마다 했더니 승산 없는 질투는 하지 말란다. 웬만해선 대꾸도 잘 안 하는 사람이 그런 말은 서슴지 않는다. 나는 그만 시무룩해진다. 질투라는 말도 걸리지만, 승산이 없다는 말을 꼭 해야 하나. 마당의 부인들이 어여쁜 자태를 뽐내는 동안 창가의 마님은 조금 외롭다. 나도 한 때 꽃 같은 시절이 있었거늘---.

꽃들도 얄미운 데가 있다. 마당쇠만 보면 활짝 웃는다. 웃을 뿐만 아니라 살랑거린다. 어느 날 해 질 무렵 내가 미인 앞에 서 있는데 남편이 나왔다. 그러자 갑자기 미인이 흔들렸다. 바람도 별로 없는데 잔가지가 떨리고 꽃잎이 하늘거렸다. 그 때 마당쇠도 분명히 마주 웃었다.

그러나 탈대로 타면 불꽃도 이운다. 바라보는 눈길이 아무리 애원해도 지는 꽃을 잡을 수는 없다. 봄이 저물어 나무들의 그림자가 짙어지면 마당쇠의 얼굴에도 그늘이 진다. 이윽고 꽃이 지고, 그는 묵묵히 지친 남들을 보살핀다. 늘어진 가지를 묶어 주고, 분을 갈고, 몸 푼 나무를 위해 흙을 돋운다. 그러고 나서도 얼른 돌아서지 못한다. 내년을 기약하는 인사가 길기도 하다.

이별가를 부르리까, 한 마디 하려다 그만둔다. 마당쇠의 어깨가 처져보인다. 날개를 접은 뒷모습이 호젓하다. 그도 한 때는 범나비 같은 시절이 있었거늘--.

봄날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