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묘지 / 장정일
나 대낮에 꿈길인 듯 따라갔네
점심시간이 벌써 끝난 것도
사무실로 돌아갈 일도 잊은 채
희고 아름다운 그녀 다리만 쫓아갔네
도시의 생지옥같은 번화가를 헤치고
붉고 푸른 봄이 날름거리는 횡단보도와
하늘을 오를 듯한 육교를 건너
나 대낮에 여우에 홀린 듯이 따라갔네
어느덧 그녀의 흰다리는 버스를 타고 강을 건너
공동묘지같은 변두리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네
나 대낮에 꼬리 감춘 여우가 사는 듯한
그녀의 아득한 아파트 구멍으로 따라들어갔네
그 동네는 바로 내가 사는 동네
바로 내가 사는 아파트!
그녀는 나의 호실 맞은 편에 살고 있었고
문을 열고 들어서며 경계하듯 나를 쳐다봤다
나 대낮에 꿈길인 듯 따라갔네
낮선 그녀의 희고 아름다운 다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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