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 / 김정실
더위는 날이 갈수록 그 기승이 대단하다.
학교는 방학에 들어갔고 직장은 휴가에 들어섰다. 아들 녀석한테서는 언제 내려온다는 연락도 없다. 귀는 대문과 전화통 쪽으로 세워 두고 이런 저런 생각으로 마음은 반반이 되어 더위를 받아 내고 있었다. 방학을 마냥 놀면 어쩌지 하는 마음이 들면서도 자연과 사람 사이에서 얻어지는 멋과 낭만은 미래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으로 기다림과 조바심을 달랬다.
열대야가 이어지고 있을 즈음, 검게 그을린 아들이 허연 이를 드러내 보이면서 들어섰다. 이것저것 물음에 아들 녀석은 “예”, “아니오”로만 대답할 뿐이지 자기대로는 가 컸다고 말수를 아끼고 있다.
저녁 자리에서 앞 뒤 설명도 없이 아들 녀석은 불쑥 한마디를 내뱉었다. 서울 올라갈 때 백설기 떡 한 되만 만들어 가져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이다. 모두가 깜짝 놀랐다. 순간적으로 이상한 공기가 돌았다. 침묵과 함께 서로의 얼굴과 눈빛으로 마음과 생각들을 읽기에 바빴다. 난 백설기가 왜 필요한지 어디에 쓸 것인지를 어떻게 무엇부터 물어 보아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다만 말을 뱉어 낸 아들 녀석은 천연덕스럽고 즐거워 보였다.
아침 등산 길에 아들을 데리고 나섰다. 나무 아래서 숨을 돌리며 졸업 후 취직과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슬쩍 꺼내 보았다. 그러면서 숫자의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어떤 숫자를 좋아하느냐고 물었으나 대답이 없다. 듣고 있는지 모르지만 열심히 설명을 해 주었다. 아이가 생기는 것은 포태(胞胎)일에서 40주(실제 266일) 후 출생에다 100일을 더한 뒤 1일(겹치는 날)을 빼면 365일이 되어, 자기 생명이 시작한 날의 일주년이 되는 날이라고 알려주었다. 더욱 쉽게 척돌이라고 힘을 주어 말했다. 내가 왜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지 그 까닭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들 녀석은 별 반응 없이 나뭇잎만 흩으면서 오르고 있다.
답답한 사람이 말이 많듯이 다시 백설기 떡을 왜 해먹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옛날에는 질병으로 인해 백일을 잘 넘기지 못했기에 백 집을 돌아 한줌씩 얻은 쌀로 떡을 만들어 무병장수를 빌었다고 설명을 했다. 또한 삼신할머니가 잘 돌 보아 주셨다고 믿어 흰떡으로 백 집 을 돌려 100일 되는 날을 알리는 것이라고 했다.
어떤 반응과 대답도 하지 않으니 더욱 어색함이 돌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떡도 좋아하지 않는 네가 이 무더운 여름날에 백설기라니 걱정이 앞선다고 진짜 속마음을 털어놓고 아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해는 산 위로 다 솟아올랐고 사람들의 오르내림이 많아짐으로 산의 고요함이 깨어지고 있었다. 한참을 앞서가던 아들 녀석이 겸연쩍은 웃음을 보이면서 깜짝 이벤트를 할 작정이라고 입을 열었다.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 하는 이벤트인지 성급한 마음이 다시 재촉을 했다.
계곡의 바위에 걸터앉더니 사귀어 온 여자 친구와 팔월 말이면 석 달하고 열흘째가 된다고 했다. 젊은이들의 방법대로 커플 반지만 만들어 끼기가 너무 흔한 일 같아서 떡까지 곁들인다는 것이다.
마음으로 걱정했던 것보다는 별것이 아니지만 생각했던 대로였다. 마음을 가라앉히며 처음부터 알아듣도록 정확하게 이야기를 할 것이지 속을 태우게 했다고 머리통을 꾹 꾹 쥐어박아 주었다.
아침저녁 아니 시간 시간으로 마음이 간사하게 변한다더니 그 말이 꼭 맞는 것 같았다. 지금은 사랑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고 취업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줄 중 어느 쪽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미운 묘한 감정이 일었다.
말수가 적어진 아들 녀석한테서 자꾸 이것저것 물어 보고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는 실제로 어떤 처녀인지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깜짝 이벤트까지 만들어내야 하도록 마음을 사로잡은 처녀가 어떤지 마음은 확대되어 갔다.
대구 특유의 더위도 경험할 겸 내려오도록 하면 어떠냐고 의견을 내놓았다. 떡도 맛과 품위를 갖추어 만들어 주겠다고 설득을 했다.
서울로 올라가던 날 아들은 “예”라는 답을 주었다. 그 말을 들은 다음 마음은 첫아이의 백일로 돌아가 혼자서 둥둥 뜨는 기분이 들었다. 저 아이의 백일 날은 얼마나 청청 푸르렀던가. 아들 녀석은 그때의 내 기쁨보다 더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듯 보였다. 서로 좋아한다고 해도 그녀가 우리의 마음에 들지, 아니면 아들 녀석이 그녀의 부모님 마음에 들지도 생각하게 했다. 양가 서로에게 선택이라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도 신경을 세우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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