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에서의 맥주 한 잔 / 최이안
언니!
이번 여름은 비가 줄기차게 내려요.
차라리 언니가 사는 사막의 햇살을 부러워하지요.
어쩌다 해가 나면 세탁기부터 돌려야 해요. 여행에서 돌아와 쌓인 빨래들을 며칠에 걸쳐 간신히 해결했답니다.
북해도는 잘 다녀왔어요.
대부분의 표기가 일본어로만 되어 있어서, 비슷한 우리 나라도 어서 외국인을 배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이나 환경이 비슷해서 잊고 있다가도 언어에 이르러 이곳이 타국임을 절감했지요.
마을은 이야기 듣던 대로 곳곳이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었어요. 흡사 일본인의 태도를 풍경에서 읽는 듯했지요. 남보다 더 눈에 띄려고, 목청껏 아우성치는 것 같은 현란한 간판들이 없어서 거리가 더 얌전하게 느껴졌나 봐요.
친절과 예의는 단지 그들의 국민성일까요. 앞선 문물을 일찍 받아들인 탓에 사람들의 의식도 앞서 간 것일까요. 일분의 소나무는 아주 곧게 일률적으로 뻗어 있더군요. 아랫부분부터 휘어져 제각기 용틀임하는 한국의 소나무와는 달랐지요. 흔히 한국인은 집단 속에서보다 개인적으로 있을 때 강하고, 일본은 그 반대라고 하지요. 한국인의 개성과 일본인의 순응이 소나무에서 나타납니다. 일정한 대지에서 일어나는 기운의 조화가 오묘하네요.
옛 항구도시 오타루는 운하를 따라 늘어선 창고를 외관은 살리고 내부를 식당과 상점, 박물관으로 개조했어요. 과자점에서는 비스킷이나 카스테라, 초클릿을 시식용으로 내놓았고, 각종 아기자기한 장식품과 그릇은 여자의 눈길을 사로잡았지요. 하지만 아무것도 사지는 않고 눈요기로 만족했지요. 점점 무엇을 산다는 것이 짐스럽게 여겨지네요. 태엽을 감으면 음악이 나오는 보석함도 욕심나지 않고, 고소한 과자도 한입 먹어 본 것으로 만족감이 드네요. 마음만 먹으면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예전에는 엔화 가치가 높아서 한국 사람들이 가면 돈쓰기가 두려웠다는데 이제는 물건 값이 비슷했어요. 우리도 그만큼 잘살게 된 것일까요. 거리에 다니는 자동차들은 거의 소형차였어요. 이곳이 소도시이기 때문만은 아닐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동차를 실용의 목적으로 선택하고 있는 것 같아요. 대신 집은 아파트가 별로 없고 서양식 2층 주택이 많더군요. 지진 때문에 나무로 짓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화재를 아주 무서워한대요.
북해도의 넓이만 해도 남한의 80%가 넘고,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밀림 속에는 아직도 곰이 살고 있대요. 그 땅과 동물이 무러웠어요. 하지만 그들은 지진과 화산이 별로 없는 이 좁은 땅을 부러워할지도 모르겠네요.
삿포로에서는 맥주 박물관 견학을 했어요. 그곳에서 생산되는 4가지 종류의 맥주 중에서 하나를 골라 한 컵씩 시음을 했는데 신선하고 부드러운 맛이었어요. 삿포로에서만 파는 맥주라니 아쉽더군요. 공원에서는 맥주 축제도 열리고 있었어요. 각 맥주회사의 가게가 임시로 차려지고 안주도 팔았어요. 어스름한 저녁, 기모노를 차려입고 친구와 맥주를 마시는 젊은 여성들이 눈에 뜨더군요. 친구와 마주앉아 솔직한 한때를 보내는 모습이 어찌나 행복해 보이던지요. 왜 여행 중엔 다른 사람의 행복이 더 잘 보일까요. 관찰자의 시각은 너그럽기만 합니다.
일 년 중 6개월은 눈이 내린다는 이곳에서 설경을 바라다보며 맥주를 마시면 환상적일 거예요. 일본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삿포로는 살고 싶은 도시 1위에 올라 있대요. 깨끗한 공기에 멋진 설경, 맛있는 맥주까지 있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원주민인 아이누 마을도 방문했어요. ‘아이누’ 는 ‘사람’ 이란 뜻이고, 그들도 아이가 3살이 될 때까지 이름을 짓지 않고 ‘큰 똥’, ‘작은 똥’ 하는 식으로 불렀대요. 우리가 아이를 ‘개똥이’ 라고 불렀듯이 말이에요. 아이를 천하게 부름으로써 보호하고자 하는 공통된 마음이 읽혀졌지요. 여자들은 20세까지 순차로 손등과 입술 주위에 문신을 했대요. 문신이 완성되면 결혼이 가능했고요. 입술 주위에 입술보다 더 큰 모양의 시커먼 문신을 한 사진을 보니 섬뜩하더군요. 왜 그들은 여자에게만 문신을 강요했을까요. 고통을 강요함으로써 인내를 터득하게 한 것일까요. 손등은 그렇다 치고 입 주위에 문신을 한 것은 모든 여자의 외모를 동등하게 함으로써 분란의 소지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 것이었을까요. 산속에 사는 순수 원주민들도 이제는 문신을 하지 않는다니 다행입니다.
그들이 청혼하는 방식도 흥미롭더군요. 남자가 여자 집에 청혼하러 오면 남자는 밥 한 그릇을 받아 반만 먹고 여자에게 준대요. 여자가 나머지 밥을 먹으면 결혼을 승낙하는 것이고 안 먹으면 거절의 의미래요. 부부는 한솥밥을 먹는 사람이란 의미겠지요. 그래도 남자가 먹던 밥을 먹어야 하는 데서 남존여비의 사상이 엿보이네요.
집 안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천장에는 연어를 매달아 훈제시키는 모습도 재현해 놓았더군요. 집 앞으로 흐르는 강에서 잡은 큼지막한 연어가 먹음직스러웠어요. 남자들이 사냥이나 낚시를 하는 동안 여자들은 아이들 돌보고, 농사짓고, 옷을 지었겠지요. 그들의 복장을 장식한 무늬는 자신의 부족을 상징했다는데 사슴뿔과 비슷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을 여인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답니다. 삶이란 그런 것이려니 하고, 흐르는 강물처럼 하루하루를 보냈을 여인들의 일상이오.
노보리베츠라는 온천지대의 호텔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유카타를 입고 다녀서 이상했어요. 잠옷 겸 실내복으로 각 방에 비치된 유카타를 입고 식당에도 거리에도 다니는 것은 일본만의 풍습인 것 같아요. 나도 한 번 그래 볼까 싶었지만 용기가 안 났답니다.
대부분 상점에는 고양이 인형이 놓여 있는데 오른손을 들고 있는 고양이는 돈을 부르고, 왼손을 든 고양이는 사람을 모으며, 양손을 든 고양이는 욕심쟁이라네요. 한국이라면 화끈하게 양손 든 고양이를 가게에 놓을 것 같은데, 일본 사람들은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한쪽 손만 든 고양이가 대부분이네요. 여기서 고양이는 복을 부르는 동물로 인식되고 고양이를 모신 신사가 전국에 70개 정도나 된다고 해요. 하긴 인형을 모신 신사도 있다고 하니 고양이 신사는 아무 것도 아니겠죠.
첨단 기술력을 자랑하는 나라가 아직도 전통적 다신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에요. 일본에서 유망 직종 중 하나는 사이비 교주라고 하더군요. 그만큼 그들은 무언가 믿기는 좋아하지만, 한 곳에 마음을 다 주지는 않나 봐요. 그들의 국민성대로 조심조심하면서 여기 조금, 저기 조금 하는 식으로 믿음을 나눠 주는 것 같아요. 모든 이에게 친절하듯이, 그들은 모든 신령에게도 친절하네요.
며칠간이나마 엿보고 나니 일본에 대한 호기심이 더 생기네요. 하나를 알면 더 알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니까요. 낯선 땅은 삶을 자극하는 촉매제가 되지요. 일상에서 벽에 부딪칠 때마다 가방을 싸고 싶어지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겠지요.
언니는 ‘사막에서 유배생활 중’ 이라고 했죠. 타국에서의 삶은 언제나 유목민의 심정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언니, 그곳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여행 중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그러면 훨씬 견디기 쉬울 거예요. 여행 중엔 행복이 더 잘 보이니까요.
언니가 있는 곳도 ‘삿포로’ 예요. ‘삿포로’ 는 아이누 말로 ‘건조하고 크다’ 라는 뜻이거든요. 언니, 목이 마르면 맥주 한잔, 어때요. 여행자의 갈증을 적셔줄 오아시스 대신으로요.
오늘 저녁, 저도 몇 모금 마시렵니다.


'수필세상 > 좋은수필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 필]이옥설 / 이규보 (0) | 2011.09.01 |
---|---|
[좋은수필]백양나무에게 다가가다 / 정혜옥 (0) | 2011.08.31 |
[좋은수필]묘각사에서 / 최계순 (0) | 2011.08.29 |
[좋은수필]연(緣)의 연(蓮) / 김정화 (0) | 2011.08.28 |
[좋은수필]백일 / 김정실 (0) | 2011.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