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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백양나무에게 다가가다 / 정혜옥

백양나무에게 다가가다 / 정혜옥

 

 

 

한차례 바람이 불었다. 백양나무 잎이 땅에 떨어진다. 좀 더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매달려 있던 마지막 잎들이 우수수 흩날린다. 어떤 것은 힘없이 내려앉기도 하고 어떤 것은 몸부림을 치며 바람 따라 가고 있다. 생명의 끈에서 분리되어 순식간에 죽은 존재가 된 나뭇잎들, 그 분리의 과정이 장엄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지금, 우포늪으로 새를 보러 가는 길이다. 바람 때문에 걸음을 멈추었다. 백양나무 한 그루가 바람에 부대끼고 있다. 초겨울 바람은 무언가를 재촉하는 듯 나무를 흔들어댄다. 나는 늪에서 솟아오르는 새의 비상을 보기도 전에 마지막 못을 벗고 있는 백양나무를 먼저 보고 있다.

백양나무는 아름다운 나무이다. 가계가 뚜렷한 나무이다. 흰 명주를 몸에 감고 있는 것 같은 깨끗한 줄기며 봄날의 눈부신 풋잎들, 여름날의 순결한 그늘과 가을 잎의 표표함 등, 봄, 여름, 가을의 찬란한 때가 지나고 나면 백양나무는 거느리고 있던 잎들을 미련 없이 떠나 보낸다. 그리고 외롭고 엄격한 겨울나무가 된다.

측백나무 한 그루가 백양나무 옆에 있다. 측백나무의 모습은 백양나무와 영 다르다. 침침한 잎들을 완강하게 붙들고 있다. 덕지덕지 포개져 있는 나뭇잎 때문에 짓눌리듯 서 있다.

얼음을 떼어 놓았다. 몸이 무겁다. 팔도 다리도 자유롭지 못하다. 긴 외투며 목을 감고 있는 목도리와 입을 덮은 마스크, 손에 낀 장갑과 신발 등, 한 점의 바람도 용납하지 않는 나의 옷차림이 문득 측백나무와 닮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무거운 잎을 움켜쥐고 바람에 대항하는 측백나무처럼 나도 완전무장을 하고 초겨울 바람과 맞서고 있다.

나는 백양나무의 흉내를 내듯 입을 가린 마스크며 목도리와 모자를 몸에서 제거하였다.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상쾌하다. 외투의 단추도 풀었다. 심장 가까운 곳에 햇빛과 바람이 자유롭게 들어온다.

백양나무의 빈 가지 사이로 먼 풍경이 보인다. 몇 겹으로 포개어 있는 산의 능선이며 산과 산 사이의 골짜기며 산비탈에 엎디어 있는 붕분들이 눈에 뜨인다. 먼속의 모습이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백양나무가 거느리고 있던 무성한 잎들을 모두 떨어내 버렸기 때문이다.

산과 산, 먼 들판. 나무의 끝까지 등, 비어 있는 벌판과 비어 있는 나무들이 쓸쓸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가 닿을 수 없는 아득한 영원성에까지 연결되어 있다.

우포늪 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은 모든 것을 빼앗아 갈 것처럼 매우 거세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내게로 달려오는 바람을 막아내었다. 풀었던 목도리를 다시 두르고 장갑과 마스크를 꼈다. 머리 위에 모자도 쓰고 겉옷의 단추도 꼭꼭 채웠다. 아까의 우둔한 모습으로 나는 되돌아갔다. 이제 아무리 바람이 불어와도 끄떡도 않는 존재가 되었다.

새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든다. 하늘에 새가 떠 있다. 새들은 방금 우포늪에서 솟아올랐을 것이다. 유유하게 창공을 지나가고 있다. 옷을 벗은 백양나무와 늪을 떠난 새들, 문득 느낀다. 백양나무의 아름다운 변신과 새의 비상을 바라만 볼 뿐 아무 짓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을.

나는 언제쯤이면 모든 것을 털어낼 수 있을까. 빈 몸, 빈 마음이 될 수 있을까. 비어 있는 것이 누리는 자유를 나도 누릴 수 있을까.

어느새 오후가 되었다. 하늘 위의 새들은 멀리멀리 날아가고 뼈와 뼈만 남아 있는 백양나무는 겨울 정신을 수용하듯 가만히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