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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야, 단수 한번 높구나 / 이윤기

야, 단수 한번 높구나 / 이윤기

 

 

 

구차한 말 살림, 글 살림 근근이 해온 처지여서 남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형편이 늘 못 되었다. 내 코가 석자인데 싶어서, 어떻게 쓰면 좋아요, 문학의 미래는 어떤가요, 이런 질문을 더러 받아도, 모른다, 모른다, 하면서 ‘낮은 포복’ 으로 기어왔다. 그런데 말할 ‘군번’ 이 되었단다.

무슨무슨 상 시상식이나 기념식장 갈 때마다 경험한다. 이런 예식에서 축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적다. 축사는 지위 높은 사람에게 차례가 가는 것이 보통인데 높은 자리에 독창적인 인간이 앉을 확률은 매우 낮다. 높은 사람들이여, 미안하다. 이건 ‘피터의 법칙’ 이라는 것이지 내 말이 아니다. 그래서 독창적인 축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축사 같은 거, 하나마나, 들으나마나다. 문제는, 시상식일 경우, 수상자의 수상 소감이다. 수상자가 소감을 담담하게 말하면 좋은데, 대게는 저고리 안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 꺼내어, 미리 써둔 것을 읽는다. 말하지 않고 읽는다. 말하는 것과 읽는 것은 다르다. 왜 읽겠는가? 자신의 발언이 공식화하는 것을 의식하거나, 자신의 수상소감이 어디엔가 게재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일 터이다. 하지만 그런 수상 소감은 수상식장에서 아무 울림도 지어내지 못한다. 무슨 까닭인가? 관념어로 꽉 짜인, 줄줄이 복문장(複文章)이다. 듣기에 너무 어려운 그 소감은 ‘읽는 말’ 이다. ‘눈의 말’ 이다. 글말이다. 수상식장의 하객들이 기다리는 것은 ‘듣는 말’ 이다. 입말인 것이다. 그러니까 수상자는 듣는 말, 귀의 말, 입의 말을 기다리는 청중에게 읽는 말, 눈의 말, 글의 말을 들려주고는 총총히 연단을 떠나버리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 글 쓰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기본기가 무엇인가? 그 중 하나가 바로 ‘발화(發話)의 상황’ 에 대한 정교한 ‘대응 감각’ 이다. 내가 여기 예시한 수상자는 자기 생각을 언어로 바꾸는 과정에서 발화의 상황에 제대로 ‘대응’ 하지 못한,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에 속한다.

인터넷에 오르는 글들이 우리말을 파괴한다고 걱정들이 태산이다. 그런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나는 긍정적인 측면을 주목한다. 많은 사람들이 엄숙주의의 굴레를 벗고 청산유수로 글을 토해낸다. 화가가 쓴 글, 가수가 쓴 글이 인문학자가 쓴 글보다 부드러우면서도 정교한 경우를 자주 본다.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기는가? 나는 문어가 구어화하고 있는 것을 주목한다. ‘이메일’ 을, 많은 사람들은 쓴다는 기분으로 쓰지 않고 말한다는 기분으로 쓴다. 그래서 쓴다는 강박관념, 곧 생각의 흘게가 풀리면서 말이 술술 나오는 것 같다. 우리말은, 우리 문학은 그 쪽으로 가파른 기울기를 보일 것 같다. 김화영 교수가 한 일간지에 쓴, <시가 있는 아침>의 짧은 글들을 기억하시는지. 이 근엄한 문학평론가가 쓴, 내가 소설에다 실험하고 싶어하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기억하시는지.

“야, 요거 참 삼삼한시네. 그런데 왜 삼삼하냐고 누가 물으면 뺨 맞은 듯 깜빡, 몰라져버리네.”

“여기까지는 어떻게 시인의 흉내를 내겠는데……야, 단수 한번 높구나.”

“그러니까 무슨 분위기 좋은 찻집 같은 데 남녀가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단 말이지……농담 따먹기만 하고 있단 말이지……그만 앞에 놓인 찻잔을 엎질렀단 말이지……그런데 정작 쏟아진 것은 이쪽 마음이다 이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