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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열 개의 눈 / 강미나

열 개의 눈 / 강미나


 

 

그 봄, 시어머니 되실 분이 당신의 막내며느리 될 색시를 만나보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그를 따라 과일 바구니를 들고 집을 나섰다.

그때 콩깍지가 낀 내 눈에는 천지가 봄이었다. 시외버스 정류소의 차장 목소리에도 생기가 돌고, 바삐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도 경쾌했다.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속이 울렁거렸다 생초, 수동을 지나 안의, 산천이 낯설었다.

팽나무가 있는 이층 양옥 앞에 택시가 섰다. 대문이 열리자 하얀 스피츠가 먼저 달려 나왔다. 놀라 뒤로 물러서는 나를 어른들과 아이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연초록 봄을 머금은 한 아름 정원이다. 금잔디가 깔린 정원에는 제비꽃 진 자리에 보리알 모양의 씨앗주머니가 달렸다. 담장 가 볼을 붉힌 산당화 밑에 노란 양지꽃이 부러운 눈길을 맞춘다. 현관 입구 장미덩굴 아치에서 연한 향이 인사를 했다.

단아한 여인이 방안에 앉아 있었다. 어머니라고 했다. 나는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 채 인사를 올렸다. 내가 자리에 앉자 손으로 당신 앞 방바닥을 두드렸다. ‘이리 가직이나는 얼결에 다가앉았다.

내 처자를 보고 싶은데. 잠시 만져 봐도 되겠는지.”

나는 놀라서 어깨를 움츠렸다.

미안해요 초면에. 내가 눈이 잘 안 보여서. 이렇게라도 막내며느리 될 처자를 보고 싶어 그러니.”

나는 눈을 꼬옥 감았다. 여인의 떨리는 손이 내 정수리에 닿았다.

두 손바닥이 매끄러운 머리카락을 타고 내려왔다. 손이 뒤 꼭지를 쓰다듬었다. 머릿결을 타고 내려온 손길이 다시 이마로 왔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평원을 더듬고는 잠시 주춤하다 엄지 끝으로 두 눈썹을 사알 쓸었다. 나는 미간이 잘로 좁혀졌다. 감은 눈 위로 한 오라기 바람이 성글고 긴 눈꼿을 지나갔다. 이어 손길은 관자놀이에 머물렀다. 분 바르듯 광대뼈에서 손이 떨리고 있었다. 엄지와 검지가 귓불을 잡고 귓바퀴를 돌았다. 좌우에 펼쳐진 평지를 거슬러 오르더니 제법 솟은 콧방울을 지나 줄금 그리듯 부드럽게 인중의 홈으로 흘러내렸다. 순간 나도 모르게 입술을 오므렸다. 오므린 입술 위로 세 손가락이 닿을 듯 말 듯 입맞춤을 했다. 여인의 손길이 턱을 내려오고 나서야 나는 침을 삼켰다. 그 목덜미를 스쳐 어깨로 내린 손길이 잠시 주춤했다. 조붓한 어깨를 감싸듯이 두 손이 미끄러졌다. 작은 내 몸은 염축염축 오그라졌다. 내 입안이 마른 논처럼 바짝 말랐다. 손에 꼭 쥔 손수건이 더웠다.

여인은 땀 벤 손으로 내 손을 잡으며 내 이리 본다고 무얼 알 수도 없으면서 그냥. 그저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을 지녀 몸만 건강하면 살림도 일구고, 우리 식구가 되는 거지요. 이 손으로 내 아들과 서로 다독이고 섬기며 잘 살아요.” 했다.

 

시어머니에게 병이 찾아 온 것은 시아버님을 잃고 난 후부터라고 한다. 입이 바짝 말라 물을 들이켜도, 먹고 또 먹어도 허기가 졌다. 당뇨병이었다. 그 합병증이 눈으로 왔다. 점점 눈을 비벼야 했고, 눈약을 암만 넣어도 소용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한쪽 눈마저 소금 꽃을 피웠다. 내가 선을 보러 갔을 때에는 더듬어야 알 수 있었다. 서너 해가 더 지나서야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 수술이 잘 되었다. 두 번의 강산이 바뀌는 세월동안 환한 세상을 보았다.

 

야야, 머리 빗질 좀 해 다고.” 화사하게 분 바르고 나들이 간다고 따라 나선 어머니는 요양병원에서 세 번의 겨울을 맞았다.

뉘요. 날 아는 사람이요?” 달포 전에 왔을 때만 해도 왔나.” 했건만 나는 침대로 다가가 앉았다.

다시 한 번 보이소.”

가만, 내 딸인가 뉘더라.” 가무룩한 기억을 더듬듯이 눈을 감아 깜빡인다.

그럼, 이 사람은 누구지예?”

이 양반은 내 동생 아이가. 아이고 내 모르것다.” 남편이 설핏 고개를 숙였다.

젊어서는 육안이 병이 들어 볼 수 없어 애 끓이더니, 이젠 두 눈으로 훤히 보면서도 아들의 어룽한 물빛을 코앞에 두고도 알지 못한다. 그리워하던 시간은 길어 이젠 만져보는 것도 잊었는가. 안타까움에 마른 눈을 닦아낸다.

오른손에 쥔 것을 왼손에서 찾는 어머니, 머리에 억새 이고, 아흔 고개 넘어간다. 이제는 장미가 시해서 찔레꽃이 되어버린 어머니. 당신이 좋아하는 찔레꽃은 행여나 돌아볼세라 기다리고 있건만, 어머니의 마음은 찔레 향을 움켜쥔 거인에게 포위되어 자꾸 그 겨울 골짜기 끝으로만 간다. 인고의 세월을 넘어온, 보아도 알 수 없는 갈색눈망울은 겨울 산 능선의 끝없는 시공을 아직도 헤아리며 서성거린다.

 

나는 어머니의 두 손을 잡고, 가만히 내 얼굴에 대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