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훔치다 / 안정혜
아홉 살이던 가을, 나는 아는 집에서 아무도 모르게 물건을 집어 온 일이 있다. 며칠 후 그 집 어른들은 용케도 그것을 찾으러 우리 집에 왔다. 그때 죄의식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바로 내드리고 나서도 울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양심이 없었던 것으로 짐작이 간다. 정말 그게 나쁜 짓인지 몰랐을까. 엄마한테 그 일로 매를 맞은 기억이 없다. 어처구니가 없다보니 엄마는 엄히 타일러 주는 것으로 끝냈다. 동생이 보고 있었지만 부끄러운지 전혀 몰랐다.
그 나이 되도록 피란 다니느라 학교가 무엇 하는 곳인지도 몰랐고 앞으로 학교를 다녀야 하는지도 몰랐다. 아버지가 전염병이 무섭다고 피난민 학교에 안 보내 주니 학교는 무서운 곳인 줄만 알았다. 이름자는 물론 아라비아 숫자도 읽을 줄 몰랐다.
실은 내 교육 문제로 아버지는 여섯 살 가을에 춘천에서 서울로 이사까지 왔다. 허나 다음해에 한국 전쟁이 났으므로 학교도 들어가고 한 겨울에 피란을 나가야 했다. 피난지에선 산 밑 외딴 집에서 살았으므로 신문사 가자였던 아버지조차 산에서 땔 나무나 했고 나는 꽃이나 꺾으며 산보라도 나온 듯 겅중겅중 뛰어 다니며 놀았다. 세상 물정을 알 리 없으니 그냥 행복했다.
정전 후 피난처에서 서울 우리 집으로 돌아가지 않거 아버지사업을 위해 강원도로 들어갔다. 사업 파트너가 사시는 동네의 어느 집 사랑방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 때 나는 그 집 아이를 잘 데리고 놀았다. 얼마 지나 아버지가 읍내에 집을 지었으므로 또 이사를 했다. 난 그 아이가 보고 싶었다. 혼자 가기엔 꽤 먼 거리였지만 어찌 어찌 그 집엘 찾아 갔다. 그 애와 잘 놀다가 저녁 때 돌아오면서 책상 위에 있던 그 물건을 엉뚱하게도 들고 온 것이다.
어쩜 나는 그것을 보는 순간부터 잔뜩 눈독을 들였을지도 모른다. 내 눈을 현혹시켰던 그것은 보기보다도 훨씬 중요한 물건이었다. 그 댁 군인 삼촌이 휴가 오던 날 끌러 놓았다가 휴가 마지막 날 없어 진 것을 알고 난리가 났던 ‘군번’ 목걸이였다. 그때 왜 그리 그 목걸이가 탐이 났을까. 정말 나는 바보였을까. 아무런 죄의식이 전혀 없었을까. 그때 염치를 물랐음도 분명하다. 지금 다섯 살 손자 녀석은 수치도 알고 체면도 차릴 줄 안다. 그러나 좋게 말해 나는 그 나이에도 남의 것, 내 것을 구별 못하는 맹추였나 보다. 다시 말해 교육 부재였을 것이다.
의심스러운 것은, 만일 내가 정말 천치였다면,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던 아버지 어머니가 나를 열 살에, 그것도 1, 2, 3학년을 다녀 본 일이 없는 숙맥을 4학년에 바로 들여보낼 리 없지 않은가 그때 나는 두 달 만에 한글 띠고 더하기 빼기, 분수와 구구단을 외우고 교실 문을 들어선 것이다. 학교 측에선 아이가 너무 작다고 2학년에나 받아주겠다는 걸, 아버지는 피난민 학교를 다녔다고 우기신 것이다. 부모님은 뭐 믿는 데가 있었을 것이다. 어렵지 않게 두세 갈 위의 친구들을 따라 잡았으니까. 그러고 보면 나는 너무나 맹랑했을지도 모른다.
강산이 여러 차례 바뀌고, 그 ‘군번’이라는 것을 다시 보게 되었다. 아들이 소위로 임관하고 목에 건 그 목걸이를 보는 순간 까맣게 기억 저편에 잠겨 있던 그 일이 수면 위로 생생이 떠올랐다. 이럴 수가. 그때와 똑같은 쇠사슬 목걸이이었다. 당시는 메달이 하나뿐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같은 메달이 두 개다. 전쟁 시 그들이 전사한다면 하나는 그의 입안에 넣고 나머지 하나는 부대에서 회수하여 전사자 처리에 쓰기 위한 것이라나.
나나 아들의 운명은 그 몇십 년 전에 이미 싹이 트기 시작한 게 아닐까. 그것이 아무도 모르게 뿌리를 내린 게 분명하다. 조짐은 때때로 보였다. 남편은 군인이라면 여군까지도 좋아했다. 그는 아들이 어릴 때부터 사관학교에 가게끔 유도했다. 사실 아들은 군인 체질과 거리가 멀었다. 어려서 친구들과 싸움 한 번 제대로 못했고 누굴 한 대 때려 본 일도 없다. 매일 두들겨 맞기만 하니, 다섯 살 때 태권도 도장엘 보냈다. 거기서도 수비를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커가면서 기가 살더니 육사를 가겠다는 것이다. 그런저런 인연의 끈으로 나는 군인의 어머니가 되었다. 아들은 현재 군 지휘관으로 최전방에서 나라를 지킨다. 사위조차 그들은 사관학교 동기동창으로 그 군번 목걸이를 걸고 영하 삼십 도를 넘나드는 중부전선의 철책을 책임지고 있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다. 그때 그 쇠사슬의 군번 목줄이 왜 그리 당겼을까. 나이 아홉 살에 아무리 순진했다 해도 훔친다는 개념이 정말 없었을까. 다섯 살짜리 손자조차 자신과 엄마의 자존심을 구기는 그런 것은 분명히 안할 것이다. 그럼 아홉 살 나는 그 나름의 인격이 전혀 없었단 말인가. 하긴 밤이면 늑대나 개호주가 읍내를 돌아다니던 깜깜한 세상이긴 했다. 전쟁 통에 무엇 배운 것, 본 것이 없으니 천진무구하긴 했을 듯도 싶다.
난 가끔 내 삶의 편린들을 퍼즐에 맞추듯 이렇게 저렇게 짜맞춰 본다. 왜 나는 군인들의 색인 국방색을 유별나게 좋아할까. 왜 우리 내외는 국군의 날 처음 만나 그 날이 우리의 기념일이 되었을까. 시아버님 함자에 무(武)자가 들어가고, 남편의 이름엔 ‘별’ 규(奎)자가 들어감도 개연성에 한 몫, 우리 내외는 근간에 그 좋은 제주를 뒤로하고 여기 논산 훈련소가 보이는 연무대로 왜 터를 옮겼을까, 그것도 궁금하다.
깊이 생각해 보면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눈에 안 보이는 사슬로 연결이 되어 예정된, 아니 계획된 필연에 이르게 되지 싶다. 이제 일흔의 나이에 옛날 일을 절대로 합리화시키거나 변명을 늘어놓는 게 아니다. 난 그때 그 목걸이만을 훔친 게 아니라 운명을 움쳤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면 지금 내 게 일어나는 일은 미래의 암시이며 과거와의 연결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삶은 미래의 예고편이란 생각이 든다. 성서의 구약과 신약도 계시, 예언적으로 과거와 현대가 연결되는 것을 보면 인생 역시 묘하게 고리를 이루며 예정된 길을 간다. 운명론을 부정하던 내가 나이 들면서 또 다른 눈이 뜨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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