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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노란 참외 / 박성숙

노란 참외 / 박성숙

    

 

 

어렸을 적 시골 한길은, 온종일 트럭 한두 대가 지나다닐 만큼 한가한 길이었다. 어느 여름날 그 한길에 낯선 사람들이 지나가기 시작했다. 며칠 뒤엔 길이 미어지도록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다. 하루, 이틀, 사흘 계속 몰려오며 육이오 전쟁이 났다고 떠들었다. 서울서 내려오는 피난민들이라고 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보따리를 이고 지고 힘겹게 걷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지쳐있었다. 서울서 400리 길이니 그럴 만도 하였다. 그 사람들이 해질 무렵이면 마을로 들이닥쳤다. 우리 집도 방과 마루는 물론 부엌과 헛간채도 모자라 마당에 멍석을 깔아 놓아야 할 만큼 사람들이 몰려왔다.

며칠은 가마솥에 밥을 가득 해놓고 나눠 먹기도 했지만 곡식은 금방 바닥이 났다. 곡물 외에도 고추장 된장은 물론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남아나지 않았다. 봄내 애써 가꾼 참외도 예외가 아니었다. 막 수확을 시작했는데 큰길가에 있는 밭이라 피난민들이 들어가 짓밟고 파내고 있으니 밭을 지키고 있어도 막무가내로 들어가는 그들을 막을 길이 없었다. 그나마 뻗어나간 덩굴이라도 밟지 말아야 참외가 열릴 텐데, 그들은 그런 것을 가릴 겨를이 없어보였다.

올해는 참외 농사가 잘 되었으니 우리 손녀에게 무엇을 해줄까?” 할아버지가 기뻐하시던 날이 불과 며칠 전이었는데. 지나가는 피난민들이 마구 따 먹고 있으니 말릴 형편도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어느 날부턴가, 아예 참외를 따다가 한길 옆 미루나무 그늘에 놓아두고 배고프다는 이들이게 하나씩 나눠주라고 하셨다. 동갑내기 당고모와 나는 그 일을 맡아 날마다 참외밭으로 나갔었다.

그러던 어느 이른 아침이었다. 미루나무 그늘에서 사방치기를 하며 참외밭을 지키고 있는데 짐과 사람을 태운 마차가 우리 앞을 막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비행기 4대가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서쪽 하늘에 나타났다. 그 비행기는 꼬리에 하얀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쏜살같이 날아와 내 머리 위에서 곡예를 하며 맴돌았다. 나는 엉겁결에 옆에 서있는 미루나무를 끌어안고 그 비행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바퀴를 도는가싶더니 갑자기 솟구쳤다 곤두박질치며 주먹만한 새카만 덩어리를 연달아 떨어뜨렸다. 그 순간이었다. 폭음과 함께 나는 붕 떴다가 어딘가에 쿡 쳐박혔다. 눈을 뜨니 온 세상이 먼지로 뒤덮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손을 뻗어 이리저리 더듬어봤다. 참외가 만져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일어나 집 쪽으로 뛰었다. 하지만 비행기가 나를 볼 것 같아 몇 발자국 더 뛰다가 보리밭 고랑에 다시 엎드렸다. 그때였다. 가까운 곳에서 고모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계속 들렸지만 대답할 용기도, 그곳으로 달려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신음소리와 울음소리가 간간이 섞여 들렸다. 혹시 당고모가 아닌가 초조했지만 자꾸 떨려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계속 숨을 죽이고 엎드려 있는데 꿈속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멀리서 또 들렸다. 시간이 흘렀다. 이번엔 가까이서 나와 당고모를 부르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할아버지였다. 그때서야 할아버지를 부르며 뛰어갔다. 할아버지는 한달음에 달려와 부둥켜안으며 통곡하셨다. 그 폭탄이 너희들 가까이서 터졌는데 이렇게 살아있다니 조상님이 지켜 주셨나 보다.”며 얼굴과 손 다리를 만져 보며 믿어지지 않는다고 또 눈물을 흘리셨다.

그때였다. 살려달라는 울음 섞인 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는 재빨리 그리로 달려갔다. 우리도 뒤따라갔다. 마차가 지나가던 자리엔 커다란 구덩이가 파였고 마차는 산산조각이 나 불타고 있었다. 사람들은 피를 흘리며 짐과 뒤엉켜 아수라장이었다. 할아버지는 피난민을 인민군인 줄 잘못 알고 폭격을 한 것이라고 하셨다. 큰 웅덩이가 파인 곳은 한길뿐 아니라 참외밭과 산자락에도 비슷한 모양으로 파여 있었다.

마차에 타고 있던 가족 여섯 명 중 셋은 숨을 거뒀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서둘러 마을 사람들을 불러 부산 입은 사람은 우리 집으로 업어다 놓고, 죽은 이는 가까운 산에 묻어주었다. 그때 나는 중학생이었지만 신문도 라디오도 없는 벽촌이라 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이 엄청난 현실이 무엇을 뜻하는지조차 몰랐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또 비행기를 부를 것 같아 무섭고 조바심만 더해갔다.

우리 집은 해마다 참외농사를 많이 했다. 할아버지는 그것으로 돈을 만들기도 했지만 나눠 주기를 더 즐기셨다. 나는 참외 철이면 하굣길에 친구들과 원두막에 곧잘 들렀다. 할아버지는 잘 익고 맛좋은 참외만을 따다가 그늘에 시원하게 놓아두고 우리를 기다리셨다. 10km나 되는 먼 길을 일곱 명이 걸어서 학교를 다녔는데 늘 배가 고팠다. 그 허기진 배를 참외가 채워주었으며 참외 먹는 기쁨에 하굣길이 별로 힘들지 않았다. 친구들과 수북이 쌓인 참외를 실컷 먹고 나면 할아버지는 우리들을 놀리며 웃으셨다.

가방 중에 뭐니 뭐니 해도 가죽 가방이 가장 크구나.”

평화롭던 우리 마음이 피난민으로 들끓었고 비행기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굉음을 내며 하늘을 날아다니다가 사라졌다. 마을 사람들은 그 비행기가 무서워 밭에 나가 일도 못했다. 더구나 끔찍한 장면을 목격한 나는 그 소리만 들려도 방으로 뛰어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밤에는 불빛이 새 나오면 폭격을 해올 것이라며 모깃불조차 피우지 못한 채 긴 여름을 지내야 했다.

부상 입은 3명의 환자가 우리 집에서 함께 살고 있으니 생활은 엉망이었다. 어머니는 끼니때마다 죽을 끓이고 피 묻은 빨래며 식량 걱정에다 약을 달이는 일까지 했다. 식구들은 피난민보다도 더 고된 피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밤이 되면 온 식구가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그들의 신음소리가 컸다. 더구나 3살짜리 아기는 여린 살이라 다리에 화상이 더 깊다고 했다. 거기다 엄마까지 잃었으니 밤낮없이 보채며 울었다. 할아버지는 그 아기를 업고 계셨다. 폭탄으로 입은 화상은 치료가 더 더디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약을 구하러 선으로 들로 또는 한약방을 찾아다녔다. 그럴 때마다 아기는 내 차지였다. 보채는 아기까지 업고 있으려니 땀이 줄줄 흘렀다. 아기에게 미음을 먹이는 일은 더욱 힘들었다. 이따금 투정부려도 할아버지는 내 말을 들은 척도 않으셨다. 할아버지는 그들이 온 뒤로 환자에게만 온통 신경을 썼다. 우리 할아버지가 아니라고 나는 울며 떼를 쓰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할아버지의 정성에 그들의 상처와 화상도 조금씩 차도가 있었다. 하지만 몸을 추스르니 그들은 죽은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더 크게 울부짖었다. 자기들의 설움에 남의 집이란 생각조차 못하는 그들이 싫었다. 할아버지는 그들을 보살피며 위로하느라 제때 식사도 못하고 점점 수척해 갔다. 다행이 추석이 지나면서 환자들의 상처는 눈에 띄게 아물었고 차츰 집안도 조용해졌다.

서울이 탈환되었다며 한길은 또 서울로 향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몇 달 동안 피난살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들의 걸음걸이만 봐도 알 수 있다고 할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셨다. 어느 가을날, 마침내 우리 집 환자들도 떠나게 되었다. 그날 식구들과 그들은 함께 울었다. 온 식구가 개울 건너 산기슭 묘가 있는 데까지 가서 절을 하고 그들을 배웅했다. 할아버지는 가족이라도 떠나보내는 듯 손을 놓지 못하고 산소는 당신이 보살피겠노라고 하셨다.

그 환자들 때문에 나는 잠시나마 할아버지는 무척 미워했다. 할아버지를 빼앗겼다는 생각과 할아버지가 변했다는 마음뿐 그들의 아픔도 슬픔도 생각하기 싫었다. 할아버지의 관심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다음 해에도 여전히 참외농사를 지었다. 그 참외를 첫 수확하던 날, 할아버지는 아침 일찍 괭이와 낫을 들고 집을 나섰다. 피난민 무덤 앞에서 풀도 베고 파인 곳을 다독이며 오늘이 일주기가 되는 날이라고 하셨다. 새 무덤 앞에 노란 참외를 한 바구니씩 담아 놓으셨다. 의관을 갖추고 향을 피우며 술도 따라 놓고 절을 하셨다. 할아버지 옆에서 나도 절을 했다. 할아버지와 나는 한참을 그곳에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