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교시 / 이종화
야, 개 유학간대. 회사에서 보내주나 봐. 그 녀석 끝내준다. 역시 잘 풀리는 놈은 계속 잘 풀려. 한 친구의 소식을 들었다. 대학동창 모임에서였다.
늘 부러운 친구였다. 오랜 연애 끝에 직장에 들어오자마자 결혼했고, 직장에서는 소위 힘센 부서에 뽑혀 다녔다. 결혼을 앞두고 녀석이 준비한 감동적인 프러포즈는 친구들 사이에 회자되었다. 요새는 절 꼭 닮은 아기의 재롱을 보는 데 푹 빠져 사는 줄 알았는데, 어느 새 유학 준비까지 했는가 보다. 부유한 경제 사정과 아버지라는 든든한 배경, 거기에 원만한 성격에 성실함 그리고 실력까지, 참 나무랄 데 없는 친구였다.
불안감이 밀려왔다. 점점 뒤처지고 있는 걸까. 이대로 낙오자가 되는 건 아닐까. 아버지를 일찍 여윈 탓에 그렇게 부유한 편도 아니었고 스펙도 별 볼일 없었다. 방황을 거듭했기에 실력도 부족했던 것 같다.
그렇게 서른이란 나이가 훌쩍 넘어버렸다. 그냥 이런저런 이유로 많은 게 늦어져 버린 것 같다. 이럴 때면 돌아가신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하고, 공연히 어머니와 형을 탓하기도 했다. 꾸준히 노력하면 거북이가 토끼를 이긴다지만 요새 토끼들은 결코 방심하는 법이 없었다. 선대의 토끼들로부터 물려받은 다양한 이점들을 활용해 늘 저만치 앞장서 달음질쳤다. 그래서 토끼는 토끼들끼리, 거북이는 거북이들끼리 경주하는 게 요새 세상이었다. 나는 토끼처럼 달릴 수 있을까. 스스로가 마냥 작게 느껴졌다. 소시민(小市民), 내게 꼭 어울리는 말이 었다. 문득, 오래 전 일이 떠올랐다.
수학능력시험을 치를 때였다. 1교시 언어능력을 망쳤다. 그것만큼은 자신 있었는데 영 가망이 없어 보였다. 일 년의 노력이 허사가 된 듯, 절망감이 밀려왔다. 관두고 싶었다. 쉬는 시간, 허탈감에 눈을 감았다. 갑자기 얼마 전 돌아가신 아버지 얼굴이 보였다.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정신이 바짝 들었다. 그, 첫째 시간은 잊어버리자. 남은 과목이라도 최선을 다해야지.
생각을 고쳐먹고 시험이 모두 끝날 때까지 문제 풀이에만 집중했다. 결과는 고스란히 운명에 맡긴 채 마음을 비웠다. 꼭 잘 보아야 한다는 생각은 사라졌다. 그저 주어진 문제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간절함만 남았다. 정신이 몽롱해지면, 이게 내 인생의 마지막 대학 시험이겠거니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죽기 살기로 시험을 마쳤다. 4교시 답안지를 내자 온몸의 기운이 쏙 빠졌다. 걷기도 힘들었다. 여태껏 그렇게 집중했던 하루는 없었던 것 같다.
정신력 때문이었을까. 다행히 결과가 괜찮았다. 첫 과목을 망쳤지만 2교시부터 치른 남은 과목들이 이를 만회해 주었다. 뒤늦게 알았지만 1교시 시험은 대부분의 수험생들이 망쳤던 것 같다. 그해 대학 입학시럼의 당락은 2교시 이후를 어떻게 보았는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만일 1교시를 망치고 바로 시험을 포기해버렸다면 그해 나는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게다.
오랜 시간, 그날의 간절함을 잊고 살았던 것 같다. 돌이켜 보면 세상에는 두 가지 일이 있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과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 생의 대부분을 할 수 없는 일에 허비하며 할 수 없는 일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할 수 없는 일로 인해 가슴 졸이다가, 결국 할 수 있는 일조차 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곤 했던 게 지난 삶이 아니었을까.
마음을 비운다는 건,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에 순응하는 건지도 모른다. 늘 무엇이 되려고만 했기에 불안했던 것 같다. 평생 쉼 없이 걸어도 토끼가 달린 거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겠지만, 아직까지 토끼와 더불어 경주를 할 수 있었던 사실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설령 오늘 걷는 이 길이 처음 꿈꾸었던 그 길은 아닐지라도, 나의 모든 노력이 이 길을 가기 위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며 살아가고 있다.
어느 책에서 인생 여든을 하루에 빗댄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팔십 해를 스물네 시간으로 바꾸면, 올해의 난 정확히 오전 열시에 와 있다. 공교롭게도 십여 년 전 내가 포기를 고민했던 바로 그 시간이다. 그래, 짐을 싸기에는 아직 이르다. 어서 다음 시험을 준비해야겠다. 그날 그 시간으로 돌아가자.
종이 울렸다. 곧 2교시가 시작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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