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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 2교시 / 이종화

2교시 / 이종화


 

 

, 개 유학간대. 회사에서 보내주나 봐. 그 녀석 끝내준다. 역시 잘 풀리는 놈은 계속 잘 풀려. 한 친구의 소식을 들었다. 대학동창 모임에서였다.

늘 부러운 친구였다. 오랜 연애 끝에 직장에 들어오자마자 결혼했고, 직장에서는 소위 힘센 부서에 뽑혀 다녔다. 결혼을 앞두고 녀석이 준비한 감동적인 프러포즈는 친구들 사이에 회자되었다. 요새는 절 꼭 닮은 아기의 재롱을 보는 데 푹 빠져 사는 줄 알았는데, 어느 새 유학 준비까지 했는가 보다. 부유한 경제 사정과 아버지라는 든든한 배경, 거기에 원만한 성격에 성실함 그리고 실력까지, 참 나무랄 데 없는 친구였다.

불안감이 밀려왔다. 점점 뒤처지고 있는 걸까. 이대로 낙오자가 되는 건 아닐까. 아버지를 일찍 여윈 탓에 그렇게 부유한 편도 아니었고 스펙도 별 볼일 없었다. 방황을 거듭했기에 실력도 부족했던 것 같다.

그렇게 서른이란 나이가 훌쩍 넘어버렸다. 그냥 이런저런 이유로 많은 게 늦어져 버린 것 같다. 이럴 때면 돌아가신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하고, 공연히 어머니와 형을 탓하기도 했다. 꾸준히 노력하면 거북이가 토끼를 이긴다지만 요새 토끼들은 결코 방심하는 법이 없었다. 선대의 토끼들로부터 물려받은 다양한 이점들을 활용해 늘 저만치 앞장서 달음질쳤다. 그래서 토끼는 토끼들끼리, 거북이는 거북이들끼리 경주하는 게 요새 세상이었다. 나는 토끼처럼 달릴 수 있을까. 스스로가 마냥 작게 느껴졌다. 소시민(小市民), 내게 꼭 어울리는 말이 었다. 문득, 오래 전 일이 떠올랐다.

수학능력시험을 치를 때였다. 1교시 언어능력을 망쳤다. 그것만큼은 자신 있었는데 영 가망이 없어 보였다. 일 년의 노력이 허사가 된 듯, 절망감이 밀려왔다. 관두고 싶었다. 쉬는 시간, 허탈감에 눈을 감았다. 갑자기 얼마 전 돌아가신 아버지 얼굴이 보였다.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정신이 바짝 들었다. , 첫째 시간은 잊어버리자. 남은 과목이라도 최선을 다해야지.

생각을 고쳐먹고 시험이 모두 끝날 때까지 문제 풀이에만 집중했다. 결과는 고스란히 운명에 맡긴 채 마음을 비웠다. 꼭 잘 보아야 한다는 생각은 사라졌다. 그저 주어진 문제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간절함만 남았다. 정신이 몽롱해지면, 이게 내 인생의 마지막 대학 시험이겠거니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죽기 살기로 시험을 마쳤다. 4교시 답안지를 내자 온몸의 기운이 쏙 빠졌다. 걷기도 힘들었다. 여태껏 그렇게 집중했던 하루는 없었던 것 같다.

정신력 때문이었을까. 다행히 결과가 괜찮았다. 첫 과목을 망쳤지만 2교시부터 치른 남은 과목들이 이를 만회해 주었다. 뒤늦게 알았지만 1교시 시험은 대부분의 수험생들이 망쳤던 것 같다. 그해 대학 입학시럼의 당락은 2교시 이후를 어떻게 보았는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만일 1교시를 망치고 바로 시험을 포기해버렸다면 그해 나는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게다.

오랜 시간, 그날의 간절함을 잊고 살았던 것 같다. 돌이켜 보면 세상에는 두 가지 일이 있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과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 생의 대부분을 할 수 없는 일에 허비하며 할 수 없는 일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할 수 없는 일로 인해 가슴 졸이다가, 결국 할 수 있는 일조차 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곤 했던 게 지난 삶이 아니었을까.

마음을 비운다는 건,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에 순응하는 건지도 모른다. 늘 무엇이 되려고만 했기에 불안했던 것 같다. 평생 쉼 없이 걸어도 토끼가 달린 거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겠지만, 아직까지 토끼와 더불어 경주를 할 수 있었던 사실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설령 오늘 걷는 이 길이 처음 꿈꾸었던 그 길은 아닐지라도, 나의 모든 노력이 이 길을 가기 위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며 살아가고 있다.

어느 책에서 인생 여든을 하루에 빗댄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팔십 해를 스물네 시간으로 바꾸면, 올해의 난 정확히 오전 열시에 와 있다. 공교롭게도 십여 년 전 내가 포기를 고민했던 바로 그 시간이다. 그래, 짐을 싸기에는 아직 이르다. 어서 다음 시험을 준비해야겠다. 그날 그 시간으로 돌아가자.

종이 울렸다. 2교시가 시작되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