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경계 / 안량제
산을 타고 있었다. 붉은 흙벽이었다. 풀 한 포기 나무 하나 없는 황무지의 벽을 오르고 있었다. 정상 가까운 갈림길에서 갑자기 비와 폭풍이 몰려와 멈추어 섰다. 이곳은, 멀더라도 돌아가는 안전한 길과 험하지만 빨리 갈 수 있는 지름길의 길목이다.
일행들과 의논을 했다. 위험하고 힘들어도 빨리 갈수 있는 가까운 길과 멀기는 해도 안전하게 갈 수 있는 두 길 중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를 물었다. 모험을 하기보다는 조금 돌아가도 안전한 길을 선택하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어렵게 정상에 올랐다. 먼저 오른 사람들은 땀을 식히고 전망을 즐기면서, 험로를 극복한 자부심에 환호하고 있었다.
정상에 오른 많은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 나도 섞였다. 어디선가 습득한 희귀한 물건들을 주고받고 부산하게 떠들고 있었다. 생소한 물건들이라 나도 낯선 사람들 틈에 끼어들었다. 그들은 횡설수설 옥신각신 떠들어댔지만 무슨 말들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었다.
그중 자그마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검붉은 구레나룻 수염이 얼굴을 반쯤이나 덮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새까만 얼굴은 더욱 마주하기조차 싫었다. 나를 쏘아보는 듯한 눈빛에 전율이 온몸에 쫙 퍼졌다. 심상치 않은 그 눈빛을 피하려고 얼른 그 자리를 떠나려 했으나 몸이 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아 몸부림치다가 눈을 떴다.
“아빠, 눈 떠보세요. 의사 선생님 오셨어요.”
딸아이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빙긋이 웃고 서 있는 의사 선생님이 천사 같아 보였다. 어찌 된 일인가? 지금은 현실 속의 실체들이다. 나는 침상에 누워 있고, 의사와 우리 아이들이 함께 있다.
꿈이었구나, 생과 사이 경계를 헤매는 꿈을 꾸었던 것이다. 이곳은 병원 병실이고, 여러 사람이 함께 있다. 림프종이라는 이름의 병과 투병 중인 한 생명체로서 여기 병원에 있다. ‘암’이란 병줄에 붙들린 몸이, 죽음이란 공포에서 탈출하려는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항암치료로 면역력이 약화된 틈을 비집고 폐렴까지 덮쳤다. 그 폐렴을 잡기 위한 고단위 항생제 투여로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죽음을 부르는 저승사자와 싸우느라 온 몸이 식은땀에 젖은 줄도 모르고 꿈속을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의사 선생님의 조용한 미소와 잔잔한 표정에서 믿음과 용기를 얻는다. 진료하는 표정 하나, 위로하는 말 한 마디에 기대와 실망이 순간 교차할 만큼 예민한 환자다. 따뜻한 진료의 손길, 포근한 미소, 가족들의 밝은 표정은 약보다 더한 치유 효과가 있다.
중증환자일수록 감성이 민감하고 심상은 절박해진다. 숨쉬기도 힘들어서 환자 앞에, 굳은 표정, 차가운 언행은 죽음의 그림자를 은연중 감지케 한다. 그 그림자를 바라보는 마음의 중압감이 더할수록, 병의 무게를 이겨내기는 더욱 힘들 것이다.
잠잠하던 병실에 소동이 일고,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남의 일 같지 않게 마음 졸인다. 동병상련일까. 그들의 안위가 궁금하다. 심각한 표정들의 침묵은, 소리 없는 경종으로 들린다. 초조하고 번민하는 투병의 날들이 하루가 여삼추다.
침울한 병실을 떠나, 환한 내 집에 돌아가는 몽상을 한다. 비록 그게 몽환일지라도, 그런 꿈을 꾸고 싶다. ‘생사의 경계’를 가늠하기 어려운 우울한 병실에서 보내는 날들에 지쳤던지 잠시 잠든 사이 꿈을 꾸고 있었던 것 같다.
꿈과 현실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떤 극한 상황을 벗어나려는 무한한 노력이나 갈망을 하다 보면, 수면 중에 최면으로 들어 현실 만족처럼 일시적 정신 충족이 될 수도 있다. 앞에서 본 꿈 이야기는, 병마에 지친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외로움으로부터 탈피하고파 하는 갈망을 수면 중에서나마 위안을 주려 한 배려가 아닐까 싶다.
꿈은 어디까지나 꿈일 뿐이지 현실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꿈을 가진 자, 좌절하지 말고 진실하게 부단히 노력하고 매진한다면 헛된 꿈만으로 끝나는 일만도 아닐 것이다. 허황된 꿈은 미련 없이 버리고 진실된 꿈을 가진다면, 희망과 용기가 될 수 있는 목표의 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꿈의 영감을 얻어 현실에 접합하도록 좋은 꿈을 가져보자. 그 꿈이 비록 꿈으로 그칠지라도 정서적으로는 해보다 득이 더 클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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