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사진 / 이지원
‘코닥사’가 문을 닫았다. 필름업계의 제왕으로 불리던 ‘코닥’이 올해 초에 ‘파산보호신청’을 했다. 130년의 전통을 자랑하며 근현대사와 개인사까지 담아내던 코닥필름의 몰락을 보며 시대 변화에 대응하지 못해 힘겹게 살다간 아버지가 떠올랐다.
거실에는 흑백사진 한 장이 오래도록 걸려 있다. 석양 무렵의 바다에 배 한 척이 떠있는 사진이다. 해가 저무는 바다에 마음을 물씬 적시게 하는 예술성 짙은 사진이다. 아버지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었고 사진 일은 당신의 생업이기도 했다.
고향 남도의 봄은 벚꽃축제로 시작되었다. 군항제로 유명한 진해에서 아버지는 사진관을 했다. 벚꽃이 분분히 날리는 날에 사진을 찍던 아버지 모습이 당신을 기억하는 가장 선명한 그림으로 남아 있다. 봄볕에 그을린 구릿빛 얼굴로 봄나들이 손님을 맞이하던 모습. 꽃그늘에 서서 필름을 갈아 끼우던 모습은 지금도 봄과 함께 해마다 나를 찾아오고 있다.
어린 시절, 봄을 맞은 고향은 거리마다 사람들로 흥청댔다. 월남전에 참전한 군인들이 벌어들인 외화가 호경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고향은 해군이 주둔하고 있는 곳이어서 더 그랬다. 봄 한 철 벌어서 일 년을 먹고 산다는 말은 결코 부풀려진 말이 아니었다. 지구 한쪽에서는 전쟁이 한참이었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꽃놀이가 한참이었다.
아버지의 사진관은 봄이 되면 전국에서 모여든 젊은 사진사들로 붐볐다. 때로는 우리 집에서 기숙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말이 사진사였지 실은 아버지에게 기술을 배우려고 모여든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군항제의 호경기에 편승하려는 젊은이들이 기술도 없이 모여 들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수동으로 사진기를 조작해야 했기에 나름의 기술이 있어야했다. 피사체의 거리를 맞추고 날씨에 따라 노출을 조절해야하는 것은 물론 흔들리지 않게 셔터를 눌러야 한다. 그렇게 찍은 사진들을 현상하고 인화까지 하려면 암실이 필요했기에 시내 한복판에 있던 아버지의 사진관은 붐빌 수밖에 없었다.
군인들의 야전식량이 민간에까지 흘러 다니던 시절이었다. 군인 손님이 많았던 우리 사진관에도 시레이션 박스가 선물로 들어오곤 했다. 덕분에 당시, 시중에 접하기 힘들었던 초코릿, 추잉껌, 비스킷, 빛깔 고운 젤리를 부족함 없이 먹어 보았다. 하얀 베레모를 쓴 해군들이 필름을 사거나 사진기를 빌리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던 모습이, 하늘거리는 벚꽃과 함께 행복했던 유년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시절의 우리 집은 안정되고 윤택했다. 가장으로서 아버지의 모습이 그때만큼 당당한 적이 없었다. 밭을 갈아서 열 명의 식구를 먹여 살리는 남자가 필요하던 시절이었다. 적어도 그 당시 아버지는 사진을 찍고 사진을 만들면서 식솔을 제대로 건사했다. 돈벌이를 하러 모여든 청년들에게 기술을 전수해 주는 넉넉한 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시간은 오래 머물러 주지 않았다.
필름 업계를 주름잡던 코닥사는 변화에 대처하지 못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가는 과정에서 방심했고, 그릇된 판단을 한 것이다. 디지털 카메라의 등장은 필름이 곧 사라질 것임을 예고했지만 코닥사는 새 시대를 내다보지 못했다.
흑백사진에서 천연색사진으로 바뀌고 아무나 가질 수 잆던 사진기가 대중화 되는 것에 아버지는 대응하지 못했다. 당신은 있던 자리에서 한 발짝도 옮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비록 생업으로 사진을 찍었지만 사진을 예술이라고 굳게 믿었고 컬러사진의 획기적인 기술을 인정하지 않았다. 흑백사진의 예술성만 고집했다. 세상은 바쁘게 변하고 있는데 낡아가는 자신의 기술만 믿고 세상을 탓했다.
그 사이 아버지에게 기술을 배워 독립한 한 젊은이는 아버지의 사진관 바로 앞에다 두 배나 넓고 번듯한 사진관을 차렸다. 아버지는 배은망덕해 했지만 세상은 그런 아버지를 어리석다고 뒤에서 수군거렸다. 단골들은 새 사진관에 들락거렸다. 아버지의 사진관과 비교되지 않는 최신 기계를 들여 놓았으니 그럴만도 했다. 눈앞에서 손님을 뺏기고 보니 당신은 견딜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여름이면 낚시에 열중했고 겨울이면 사냥을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생업과 취미생활이 뒤바뀐 우리 집은 지붕에 구멍이 뚫려 바람이 숭숭 들고 곳간은 휑하니 비어갔다.
아버지가 찍은 수많은 사진 중에 노을 진 바다에 떠있는 배, 그 배만 보면 아버지를 보는 것처럼 마음이 아렸다. 저물어 가는 석양 길에 떠 있는 배 한 척이 당신의 모습인 것만 같아서였다. 아버지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돛을 펴지 못하고 한 자리에서 맴돌다 석양에 지고 말았다. 당신만 쳐다보는 바다에 닻을 내리고만 있었다. 내릴 곳도 아닌 곳에다 닻을 내려버렸기에 당신의 가족들도 저문 바다에서 몹시 힘겨웠었다.
가솔을 책임져야 하는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오래도록 당신을 원망하고 미워했다. 하지만 살아보니 세상이 내 마음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내 의지로 어쩔 수 없는 일이 더 많음을 알게 되었다.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도 어떤 이에게는 수월한 일이겠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몹시 힘든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인생이 아무리 거창해 보여도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고 했다. 삶이 비극인 것은 우리는 너무 일찍 늙고 너무 늦게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코닥사는 비록 문을 닫았지만 필름 속에 희로애락을 담았던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그리움이 되어 남아있다. 흑백사진으로 기억되는 아버지는 내게 예술을 사랑했던 영원한 사진장이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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